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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Nov 01. 2023

28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람 영화

본인 출연, 제리 /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출발점이 같았다. 평생 성실하게 일하고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노년의 주인공이 전화 사기로 전 재산을 잃는다는 이야기. 보이스 피싱은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임을 확인했다.

<본인 출연 제리>가 주인공과 가족의 낙천적인 태도 때문에 마냥 어둡게만 전개되지 않는 반면,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은 소련 붕괴 전까지 사회주의 체제였던 불가리아의 사회 문제가 배경으로 어둡게 깔리면서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보이스 피싱은 너무 흔한 일이어서 때로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본인 출연 제리>의 경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주인공이 보이스 피싱에 걸려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관객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법이 너무도 전형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점점 정교하게 진화하고 있는 보이스 피싱은 사이비종교가 그렇듯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허방을 노린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오랜 세월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엔지니어로, 다른 한 사람은 교사로 3, 40년간 재직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범죄자들이 파놓은 함정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의외였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평생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다. 은퇴했다는 사실 말고도, 제리는 아내와 이혼하고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블라가는 남편과 막 사별한 상태이다. 둘의 공통분모는 외로움이다. 


제리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그들은 특별히 효자도, 불효자도 아니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삶이 있고 생업으로 바쁘다 보니 이혼해서 따로 사는 부모를 세심하게 챙길 여력이 없어 보인다. 일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제리의 큰아들은 가끔 아버지가 저녁으로 먹을 초밥을 전해준다. 그 아들이 마음에 드는 집을 봐뒀다고 하자 제리는 모아놓은 돈으로 기꺼이 그 집을 사주기로 한다. 제리의 아내는 제리와 전혀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 같다. 평생 일해서 번 돈을 모으기만 할 줄 알았지,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쓸 줄 모르는 제리와 달리, 그녀는 새로 구입한 집의 인테리어를 최고급으로 꾸미고 자신을 치장하는 데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 계발에도 열심이어서 수준급의 댄스스포츠 실력을 갖고 있다. 성격이 맞지 않아 이혼했지만, 부정적인 감정 소모는 없었는지 그들 가족은 가끔 만나서 같이 외식을 한다. 어느 날 제리는 식사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전화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다는.

블라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는데 평소에도 혼자된 엄마에게 못되게 군다. 블라가가 사기당한 사실을 알고는 자기는 타지에서 고생하며 돈을 버는데 바보같이 속아서 전 재산을 날리느냐며 타박한다. 마치 자신이 맡겨둔 돈을 사기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의지해 왔던 남편과 사별한 블라가는 이제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모든 걸 혼자 결정해야 하는 무섭고 외로운 처지에 놓인다.            

        



본인 출연, 제리(Starring Jerry As Himself, 2023)


미국 / 다큐멘터리 

감독 : 로렌스 첸    


 

<본인 출연 제리>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내세우고 있으나, 제목 그대로 주인공인 제리와 그 가족들이 직접 출연해 ‘연기’를 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실화에 바탕을 둔 극영화이다. 중간중간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삽입되어 있기는 하다. 


영화는 수십 년 전 젊은 제리가 파티에서 본인이 쓴 코미디 대본으로 연기를 하는 홈비디오 영상으로 시작한다. 제리는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 1세대이다. 생계를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일찌감치 접고 낯선 땅에 정착하는 데 어렵사리 성공했다. 평생 성실하게 일해서 번 돈을 아껴 한 푼 두 푼 모았다. 옷을 해질 때까지 입을 정도로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쓸 줄 몰랐다. 


그가 전화 사기를 당한 사실을 안 가족들은 그가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제리는 이미 벌어진 일을 아프게 되새기는 대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바닥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제까지 살아온 그대로. 자신의 노후가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 없도록. 흔들림 없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그가 대단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가 노구를 움직여 배달 일을 하는 장면은 큰 울림을 주는 한편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모퉁이에서 어떤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을 안고 산다. 중국 본토 경찰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 하루아침에 우리 돈으로 13억의 돈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제리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저무는 하늘을 배경으로 멈춰 있다. 어떤 재난이 닥치고 그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인한 일일 때 피해자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누구보다 본인일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증오보다도 자신에 대한 증오가 클 것이다. 거기에 가족의 눈치까지 보이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제리는 뻔히 예견되는 비극의 입구에서 가볍게 비켜선다. 그의 천진한 웃음은 어떤 불행이 닥쳐도 인생에는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게 위로받는 느낌의 이유였다.


제리의 둘째 아들 조나단은 영화 프로듀서인데, FBI의 요청에 따라 수사에 필요한 자료를 빠짐없이 모으던 중에 같이 작업해 오던 영화감독에게 그걸 보여주게 되었다. 영화감독이 말했다. 이게 바로 영화지.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그 아이디어를 반겼다. 제리는 젊었을 때 영화를 좋아했다. 직접 대본을 쓸 정도로 영화나 연극 제작뿐 아니라 연기에도 관심이 있었다.

제리는 특히 007 시리즈 같은 첩보영화를 좋아했는데, 아버지의 그런 취향을 반영한 게 분명해 보이는 대목이 있다. 영화에서 사기꾼은 제리의 사적인 영역까지 성큼 발을 들여놓는데 제리는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공유하는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면서 그가 지시하는 일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거래 은행의 외관을 촬영해서 보낸다든지, 담당 은행원을 대규모 돈세탁 사건에 연루된 악당이라 확신하고 상상을 펼치는 장면 등은 아닌 게 아니라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다. 제리 본인도 첩보영화를 찍듯이 즐겁게 연기했다고 한다.


소재가 보이스 피싱임을 알고 뻔한 전개를 예상했다가 예기치 않은 감동을 받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난 뒤 박수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그는 어느 정도 치유가 된 듯하다. 가족들과의 유대감도 여느 때보다 깊어진 것 같다. 무엇보다 유쾌한 분위기로 영화가 끝을 맺어서 좋았다. 마지막 부분에 나온 메이킹 필름과 전처의 인터뷰가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그가 홀로 대만으로 떠나는 장면은 마음에 무겁게 남았다. 같은 아시아권 관객으로서 금방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는지,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제리가 말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대만이 미국보다 물가가 싸기 때문이라고.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부모의 심정이 느껴져 마음이 아릿했다     

     

왼쪽부터 GV에 참석한 제리 슈, 로렌스 첸 감독, 조나단 슈 프로듀서(제리 슈의 둘째 아들)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Blaga's Lessons, 2023)     


불가리아 / 드라마

감독 : 스테판 코만드라레프

주연 : 엘리 스코르체바     



블라가는 고지식하다. 국어 교사로 오래 근무한 그녀는 누군가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을 쓰면 바로 정정해 준다. 그녀는 남편의 묫자리를 보러 다니다가 마음에 꼭 드는 자리를 발견하고 중개상과 계약하기로 말을 해놓은 참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전화 사기로 전 재산을 잃고 수중에는 매월 지급되는 얼마 안 되는 연금밖에 없다. 중개상은 블라가가 그 묫자리를 얼마나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면서도 돈을 더 쳐주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다른 손님에게 팔 심산이다. 블라가는 그 자리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중개상은 블라가의 절박한 마음 따위는 관심이 없다. 그는 그 자리가 워낙 좋은 자리라서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으며, 블라가가 약속한 금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제시하는 손님이 나타나면 그에게 팔 수밖에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노골적으로 물질을 좇는 불가리아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블라가는 그 자리를 뺏기기 전에 조금이라도 돈을 벌려고 구직 사이트에 자신의 정보를 올린다. 얼마 안 가 연락이 온다. 누가 들어도 목소리며 말투가 사기 전화를 걸어왔던 자의 것이다. 블라가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도 그들이 지시하는 일이 바로 자신이 당한 일이라는 걸 눈치 못 챌 리가 없는데 그녀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그 일을 한다. 그녀가 맡은 일은 보이스 피싱의 운반책이다. 너무도 쉽게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순간이다. 영화일 뿐인데 나는 안타까웠다. 가해자를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왜 저렇게 어리석게 행동할까 싶었다. 불가리아 경찰이 무능하고 부패했나. 아니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편 묫자리를 마련할 돈을 마련하는 데 눈이 멀어 도덕성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것인가.

반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블라가에게 불가리아어 개인 교습을 받는 학생이 있다. 그녀는 불가리아와 인접한, 나는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온 이주민이다. 그녀가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불가리아인이 되는 것이다. 불가리아인과 결혼한 그녀가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는 불가리아어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블라가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학생에게 엄격한 태도로 불가리아어를 가르친다. 가르칠 때만은 자부심이 넘치는 그녀이다.


그달 치 연금에다가 은행에서 어렵게 대출을 받아서 계약금을 만들어 중개상을 찾은 블라가는 전액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말을 듣는다. 더 절박해진 블라가에게 사기꾼으로부터 또다시 일을 의뢰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그날따라 손에 들어온 돈의 액수가 컸다. 블라가는 평소처럼 정해진 장소에 돈을 갖다 두는 대신 차를 돌려 집으로 온다. 다음날 중개상을 찾은 그녀는 묫자리 비용을 당당하게 내밀면서 중개상이 말하는 문장 중에서 틀린 단어까지 바로잡아준다. 돈을 받아 드는 중개상의 표정은 비굴하게 변한다. 단 하루 사이에 블라가는 변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다. 

블라가는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돈의 힘에 대해 철저히 학습하게 된 것 같다. 이제 그녀에게 갈등이나 죄의식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가 블라가의 집을 방문한다. 불가리아 국민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손에 케이크가 들려 있다. 대접할 차가 떨어진 것을 안 블라가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지갑을 챙겨 나간다. 마트 비닐봉지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블라가는 제자의 것이 분명한 비명 소리를 듣는다. 돈을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전화로만 듣던 익숙한 목소리다. 놀란 표정으로 계단 위에 잠시 서 있던 블라가는 돌아서 계단을 내려간다. 구두 뒤축이 땅에 부딪는 선명한 소리처럼 블라가의 표정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의 고군분투에 마음 졸였다. 그러나 자신이 겪은 불행을 선량한 타인에게 그대로 겪게 한 일이나,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이주민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주인공의 행동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식인이면서도 어리석게 사기를 당한 자신을 조롱하는 언론과 이웃들 앞에서 그녀는 분노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세상 속 고립된 그녀에게는, 사회적 양심마저도 자기를 지키는 일보다는 덜 중요한 일이 되었을까. 냉담한 세상에서 재앙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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