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발포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국장 다큐 제작 후기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2015년 4월의 어느 주말 밤이었다.
고교동창들과의 치맥데이에서 뜻밖의 이야길 들었다.
친구이자, 아산경찰인재개발원 교수 K에 따르면
”5.18 당시 전남 치안 총책임자인 경찰국장이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해
수많은 광주 시민을 살렸고 그를 기리는 안병하홀도 생겼다는거다.
솔깃한 정보였다.
다가올 5.18 특집을 앞두고 고민이 깊어가던 차에 방송 소재로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다음 날부터 너무나 낯선 이름, ‘안병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여러 자료도 확보할 수 있었다.
먼저 계엄군과 경찰이 당연히 한통속이 아니었나 싶은 마음에 가능한 일인지 찾아보았다.
전남도경국장이면 지금의 전남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자리인데 고위 간부가 서슬퍼런 독재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우연한 선행일수는 있으나, 굉장히 시혜적이고 극우적 관점을 견지하거나
뒤늦은 후회로 점철된 여생을 보내진 않았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강원도 양양 태생에 육사 8기 출신이었다.
육사 8기라면 5.16 쿠데타의 주역들 아닌가..;;
6.25 전쟁 당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고 62년 경찰 총경으로
특채된 후로도 제주도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현장 지휘한 반공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력으로 봤을 땐, 광주 시민들을 보호하고 발포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이 대단히 어색해 보였다.
설령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5.18 피해자와 유가족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만약 5.18의 숨은 영웅이라면 왜 아직까지 그가 알려지지 않았는지도 의문이었다.
곧바로, 5.18 유족회장을 만나뵀다.
안병하 도경국장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단지 경찰이었단 이유로 명예회복에 소극적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일면 수긍이 가면서도 안타까웠다.
전남대 철학과 박구용 교수님을 찾아뵀다. 명예회복이 더딘 이유가 무언지,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개념정리부터 하고 싶었다. 교수님의 결론은 명쾌했다.
명예회복이 안된 이유는 신군부를 비롯한 발포 명령자와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더뎠기 때문이고 엄정한 진상 규명의 바탕 위에서
학살 책임자를 단죄하면, 그의 명예회복도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덧붙여,
안병하 국장의 업적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거부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앞으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한결 마음도 가벼웠다.
유가족분들을 만나 뵙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남산타워 아래 후암동 허름한 반지하에서 부인 전임순 여사가 홀로 살고 계셨고
3남 안호재씨가 제작진을 반겨줬다.
반지하 단칸방이었지만 집안 곳곳이 깔끔하게 정돈돼있었다.
여사님의 평소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정복입은 안병하 국장의 큼지막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인터뷰를 마치고 동작동 국립 현충원으로 향했다.
경찰묘소 정중앙에 안병하 묘비가 있었다.
3남 안호재씨는 건너편 아스라한 아파트 숲을 가리키며
어릴 적 살던 곳이었다고 일러주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이곳 현충원에 묻힐거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회고했다.
안병하 국장이 이곳 현충원으로 묘를 옮긴 때는 2005년.
고문 후유증으로 60세의 나이로 숨진 1988년으로부터 무려 17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동안은 충북의 한 공원묘지에 묻혀 있었다.
치안감 승진을 앞두고 있던 도경국장이 한순간 직무유기죄로 해임당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신장 투석을 받으며 고생하다 숨지기까지
가족들이 감내했을 고통을 어찌 이루 말하랴.
인터뷰보다 침묵이 더 길었던 취재를 마치고 광주 내려오는 길.
갈비탕 한 그릇씩을 사 주셨다.
광주 음식이 참 맛있었는데..
말끝을 흐리셨다.
가족들에게 광주는 여전히 애증의 장소였다.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광주로 내려와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겨우 10분짜리 방송이었다.
방송 후에도 긴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안병하 국장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없었던 내게 좀처럼 기회가 오질 않았다.
여러 프로그램을 전전하다 보면서 마음의 빚으로만 남았다.
안타까운 소식을 간간히 전해듣고 있던 가운데 2018년이 됐다.
새해 첫날 영화 <1987>을 조조로 관람했다. 영화는 입소문처럼 웰메이드 시대극이었다.
특히 영화 말미에 나오는 실제 문익환 목사의 통곡 연설은 펑펑 눈물을 쏟게 했다.
감동인지 분통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불현듯 안병하 국장이 생각났다.
만약 안병하 정신이 계승됐더라면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텐데..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많이 나왔지만
이번엔 공권력 집행의 관점에서 '왜 경찰들은 강경 진압을 펼쳤는지,
꼭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병하 국장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병하 국장의 3남 안호재씨가 보낸 신년 메시지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선생님, 올해는 기필코 안병하 국장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습니다.
다큐를 만들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당시 내 업무는 생방송 매거진 데일리 프로그램 제작이었다.
다큐를 만들 상황이 아니었지만 꼭 해야겠다- 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해 3월, 방문진 다큐제작지원사업에 "민주경찰 안병하"가 선정되었고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경찰 대학생과 간부후보생 임용식에서 안병하 국장을 경찰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그렇게 다큐 제작은 운명처럼 내게 왔고, 다큐 제작 과정에서 아주 많은 분들을 만났다.
그동안 때론 내 자신을 안병하로 빙의하기도 했고, 때론 가장 시니컬한 관찰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당시 안병하 국장의 가족들과 측근들, 경찰 간부와 전경들, 시위 주동자이자 참여자들, 5.18 연구 학자와
전현직 경찰 간부,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취재 기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길 들으면서
80년 5월, 금남로와 전남도청, 전남대학교와 상무대, 나주 경찰서와 곳곳의 무기고 등에
서 있는 듯했다. 안병하 국장과 수시로 대화를 나눈 듯한 착각도 들었다.
묘하게도, 5.18과 안병하 국장의 이야길 하는데 내 삶의 고민에 대한 답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5.18 당시 숨은 영웅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어느새 마음 한켠의 무거운 짐이 덜어져 있는 기묘한 체험을...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