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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고래 PD Jul 17. 2020

안병하 치안감 아들
안호재 씨 인터뷰

악의 평범성과 일의 슬픔과 기쁨

매일 아침, 내 페이스북 계정에는 알람이 하나 뜬다.
안호재 씨가 아버지 안병하 치안감에 관한 게시물을 올렸다는 신호다.
때론 삶의 고단함이, 때론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긴 글은, 읽는 이들의 가슴에 묵직하게 얹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인 1989년부터 2020년까지 30여 년의 세월을
오로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달려온 안호재 씨.
가족들에겐 1년만 더, 1년만 더! 양해를 구하며  5.18 당시 전남 경찰에 관심을 갖는
언론사와 행사장이라면 언제 어디라도 찾아가 알렸다.
그 사이 5.18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청년은 손주를 본 할아버지가 되었다. 
수십 번, 수백 번 포기하고 싶던 그를 다잡아 준건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이름 모를 시민들이었다. 수임료를 받지 않고 소송을 대리해준 변호사, 번갈아 가며 식당에 와
일손을 도와준 경찰 식구들, 글, 그림, 목소리로 안병하를 기리고 알리는 데 힘써준 시민들.
지난 5월에는 전국 각지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금한 돈으로 안병하 평전이 출간됐다. 
안병하 기념사업회도 결성돼 활동 중이다.
호재 씨는 병든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간호했다. 어디든 아버지와 동행하는 딸 같은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지키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이름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맞서 왔다.
아버지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온 그의 두 배 소중한 삶의 이야길 들어보았다. 

PD 안 국장님은 어떤 아버지셨나요?

안 잘하든 못하든 믿는 스타일이셨어요. 각자 알아서 하라는 주의. 뭐가 되라는 강요를 안 하세요.

그래서 저도 우리 애들한테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런 말 안 해요.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죠.  


아버님이 평소에 잔소리나 엄격한 건 없는데 싫어하는 게 몇 가지 있었어요.

음식 버리는 걸 그렇게 싫어하세요.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면 놀라는 게, 

밥공기가 다른 집의 1/3 밖에 안돼요. 젊은 시절 제 친구들은 5~6번을 달라고 해야 할 정도예요

아버님이 10번이고 많이 먹는 건 좋아하는데 밥을 한 숟갈이라도 남기면 표정이 달라져요.

어른, 아이, 귀한 손님이 든 간에 그건 무조건이에요. 


그런데 딱 한번 아버님이 다른 면모를 보여주신 때가 있어요. 

해직되고 집안이 어려울 때인데 대학 시절, 일본에 단기 연수 갈 기회가 있었어요. 

저는 부담될까 봐 말 안 했는데 아버님이 그걸 아시고 세상은 넓게 봐야 한다면서 

힘든 형편에도 보내주셨죠. 그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됐죠.


또 세월 지나 생각해보니까 아버님이 알려주신 게 하나 더 있는데 그게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권 의식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해직당한 후에 일인데, 

명절 때만 되면 봉투 3개를 준비하세요. 청소부, 방범대원, 신문 배달부 아저씨에게 

1년에 2번 추석과 설에 수고한다고- 돈을 직접 드리는 거예요. 

형편이 좋지도 않았는데 꼭 그렇게 하셨어요. 그만큼 그분들을 존중했던 거죠. 

아버님한테는 그 정신이 몸에 배어 있더라고요.

 


아버지의 검소함은 사무실에서도 유명했다.

 추운 날,
관사에 보일러를 과도하게 돌렸다고 호통을 치셨다.
전남경찰국 관사에서 출퇴근할 때는
거의 걸어 다니셨다.

이번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아버님이 사복 입은 사진만 보고
언제인지를 맞히니까 사람들이 놀란다.
사복이 많지 않아서 옷만 봐도 알 수 있었던 거다.
- 페이스북 <안병하 기념사업회>에 올린 안호재 씨의 글, 6월 14일 -

PD 자식들에겐 어떠셨나요? 

안 그냥 평범했어요. 엄격한 것도 없었고, 자상한 것도 없었고. 어떨 때 보면 사무적으로도 보였어요 

워낙 말수가 적으시고 할 일 있으면 직접 하시는 분이니까 너무 떨어져 있진 않았는데 좀 그래요. 성격이. 

별로 특별하진 않고 평범한 가장이죠.


PD 5.18 전후로 집안 풍경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안 월급쟁이는 다 똑같지만 월급을 못 받게 되면 집안이 당장 힘들어지죠. 특별한 계획도 없이 

준비 없이 해직을 당하셨기 때문에.. 뭐라도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 일을 하려고 했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까 아무 일도 못하셨죠.


 PD 집도 여러 번 옮겨 다녔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시던데..

안 제가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 결혼해서 분가했는데 우연히 서류를 떼보니까 이사만 20번을 갔더라고요. 

심지어 어머니는 이사 간 흔적이 없어요. 여기서 잠깐 계시고 저기서 잠깐 계시면서 생활을 했죠. 

이사라기보다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신 거예요. 그러다가 한 10년 전인가 형제들이랑 

십시일반 해서 전셋집을 이 동네(후암동)에 얻어 드렸어요. 그랬더니 광주시청에서 압류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전화를 했죠. 가진 거라곤 전셋집 하나뿐인데 그걸 빼서 광주시청에 물어줘야 하냐고 했더니 

‘아, 그렇게 해야 된다.’ 고 하더라고요. 그럼 "그게 광주시청의 뜻이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그건 얘기 안 하더라고요. 

그다음부터 광주시청과 사이가 멀어졌죠. 어머니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신 지도 얼마 안 됐어요.   


PD  해직 이후 가장 가까이에서 간호하셨다고 들었어요?

안 제가 그 당시에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버님이 몸도 불편하셨지만 마음도 힘드셨나 봐요.

어머니는 살아 보겠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니까 아버님하고 저만 있는데 밥 해드리고, 손님 오면 대신 

손님 챙겨드리고, 우리 가족에는 딸이 없으니까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딸처럼 지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도 될 수 있으면 아버님 옆에 있었고, 친구들도 그걸 알고 집에 와서 같이 있었죠.

아버님과 같이 밥도 먹고, 같이 뭘 하자고 하면 같이 하고, 물건도 같이 옮기고 같이 치우고 

제가 군대 가기 전까진 그렇게 지냈죠. 그러다 군대를 갔다 오니까 많이 변했더라고요. 

아버님하고 할머니 하고 아주 보통 모자지간이 아니었는데  아버님이 그렇게 시름시름 앓고 

집안 분위기도 안 좋으니까 할머님이 쓰러졌어요. 그렇게 88년까지 누워 계시다가 봄에 돌아가시고 

그 모습을 보시고 아버님이 심적으로 많이 부담이 됐는지 10월에 돌아가시고 두 분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더 안타깝죠.      


아버지가 강원도 경찰국장으로 부임하자
고향분들이 자랑스러워했다.
고향 어린이들에게는 아버지가 희망이고 꿈이었다.
해직 후, 아버지는 국민학교 친구들이 있는
양양에서 요양하셨다.
병원 치료 때문에 오래 계시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남대천에서 고기도 잡고
읍내에 있는 오래된 막국수 집도 가고
밤에는 친구들과 모여서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기셨다.
아버지가 가장 행복해한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정부에서
 명예회복을 시켜줄 거라 믿고 계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장롱 깊숙이 경찰 정복을 보관하고 계셨다.
-페이스북 <안병하 기념사업회>에 올린 안호재 씨의 글, 6월 13일 -  


PD 혹시 아버지께서 5.18과 관련된 이야기는 안 해 주시던가요?

안 그건 절대 안 해주셨어요. 아무리 친구라도 외부인이니까 절대 그런 얘기를 안 하셨죠.

그런데 81년도에 종로에 친구들과 막걸리 집에 갔어요. 술을 먹고 있는데 뒤에 앉은 우리 또래 학생들이 

아버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5.18 당시 이런 사람이 있었다고. 아버님이 그랬나? 

못 들었으니까.. 그건 다른 사람 이야기인가? 생각도 하고. 그러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아버님 말씀을 되짚어 보고, 글도 읽어보면서 그날 술집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무슨 의미였는지 깨닫게 됐죠. 

 

PD 그전까진 아버지가 왜 해직됐다고 생각하셨어요?

안 그건 아버님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됐구나-라고만 생각했어요 

아버님이 아프시니까 거기에만 신경 썼어요. 아버님이 당장 아픈 게 문제지 그런 건 나중에 문제죠.  


PD 돌아가시기 전엔 어떠셨어요?

안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똑같으셨어요. 5.18 청문회를 앞두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었어요. 상의하려고요. 그 뒤로는 말이 없었어요. 

그냥 광주에서 사람들이 왔다- 그러셨어요. 

   

PD 임종은 어떻게 맞이하셨는지?

안 그날 저녁에 어머니 가게에서 일을 돕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어요. "빨리 와라, 아비가 이상하다." 통화가 불가능할 정도였어요.

바로 집으로 갔죠. 아버님은 혼수상태였고, 앰뷸런스를 부르고,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인공호흡도 했어요. 그런데 혀가 완전히 굳으셨더라고요. 그래도 몇 번 시도를 했죠 

병원에 갔더니, 오시기 전에 이미 사망하셨다고. 결국 임종은 할아버지만 보셨어요. 


안병하 치안감은 1928년 7월 13일, 강원도 양양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평생 글을 쓰고 책을 집필한 학자였고.
아버지는 원산 전문학교에서 서무과 직원으로 일했었다.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법 없어도 살 만큼'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학문을 가까이 한 선비 집안이었다.

집에서 2~3분 거리에 있는 양양 보통 공립학교를 졸업한 소년 안병하는
일본 도쿄 인근 시라오카 현 제국 중학교에 입학했다.
스스로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부모의 허락을 받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 안병하를 아버지는 대견스럽게 생각했고
그 뒷바라지를 했다.

소년 안병하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을 했다.
안병하뿐만 아니라 누님 한 명과 두 명의 남동생도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훗날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 LA에서 살았다.
                                      - 안병하 평전 241 - 242 p, 이재의 - 
안병하는 중학교 때부터 집안의 가장이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 광신상고에 진학해서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면서 집에 생활비를 부쳤다.
학교에도 거의 못 나와 사회에서 만난 동창들은 안병하가 누군지 잘 몰랐다고 한다.
그나마 고교 1년 선배인 정승화 전 참모총장과 인연이 닿아 형제처럼 지냈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전두환에 의해 군과 경찰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PD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많이 힘드셨겠어요?

안 아버지 표정이 너무 평온하시더라고요. 낮에는 늘 고통스러워하셨거든요. 

차라리 잘되셨구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혈액 투석도 큰 고통이에요. 

마취를 하거든요. 그것만 해도 3~4시간 걸리고 1~2시간 못 움직이세요. 

끝나고 집에 와서도 아무 일도 못해요 그걸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본인도 곤욕이고 보는 사람도 힘들었죠. 

 

PD 아버지가 그립거나 생각날 때 없는지?

안 안 씨네들이 그런 표현이 부족하거든요. 쉬운 예로 아버님이 임종하실 때 

앰뷸런스 타고 병원엘 갔는데 한 10년 이상은 앰뷸런스만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땐 아버님이 그리운 줄 몰랐어요. 

그런데 앰뷸런스만 보면 눈물이 나요.  그게 한 10년 가더라고요.    


PD 어느 날 갑자기 집안이 풍비박산이 됐으니까 아버지를 원망하셨을 법도 해요?

안 벌써 38년 전(2018년 현재) 일이지만 아버님 원망은 안 해요. 정부의 잘못된 체계만 원망해요

아버님이 경찰의 본분을 지키며 할 일을 다 한 거고, 그걸 지켜줘야 하는 거는 

정부와 국민인데 그게 안 돼서 문제인 거지 아버님이 잘못한 건 없잖아요. 


물론 가족들도 중요하지만 아버님은 공무원이니까 국민들도 중요한 거잖아요.  

손자들까지 힘들게 자랐어도 그 일에 대해선 절대 원망하지 않아요.

돌이켜보면 아버님을 계속 지켜온 게 어차피 내 운명이었던 거 같아요. 

편찮으실 때 곁에서 지켜드린 거나, 아버님 일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매달린 거나 

모든 것이요사람에겐 다 갈 길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PD 정확히 언제부터 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해 나서게 된 거예요?

안 정확히 따지면 아버님이 88년도에 돌아가셨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거부됐어요. 그때부터 시작이었죠. 명예회복되면 국립묘지에 갈 수 있겠구나-

시초는 그때였고 정부와 다툼이 시작된 건 94년에 광주시청과 소송하며 시작됐어요. 

1년이면 끝나겠지, 그러다 보니까 벌써 2018년이 됐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많은 세월이 흘렀죠..



1994년 광주시청의 재심의를 거쳐 5.18 관련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때 아버지가 받은, 일일 고문 보상금은 40,200원.
8일간 고문받은 걸로 계산해서 받은 보상금은 321,600원이 전부였다.
이 통보를 받고 화가 치밀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신 분들이 미안해하며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왜 그분들이 미안해해야 하나.

광주 시청에서는 자기네들도 최선을 다했다면서
되레 우리 유족을 부친을 팔아 한몫 챙기려고 한다며 
돈에 환장한 사람들로 멸시에 찬 눈빛을 보냈다.

얼마 후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추진했던 분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해 변호사를 구하고 서류를 보충해서
소송을 걸어 줬다.
변호사는 한 푼의 수수료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주셨다.
덕분에 1997년 일부 승소로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공무에 의한 사망을 확인하고도
순직자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추진했던 분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던 분은 문재인 대통령이시다.
-페이스북 <안병하 기념사업회>에 올린 안호재 씨의 글, 6월 30일 - 

PD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고 2005년에 마침내 현충원에 안장됐어요

그때 어떠셨어요?

안 그때는 저희뿐만 아니라, 우리 친척, 친구 완전히 잔치 분위기였죠. 완전히 강렬했죠.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국립묘지로 갔었거든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고, 

아버님 소원을 이루셨구나

예전에 우리 살던 집이 현충원이 멀리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였어요. 

아버님이 지긋이 국립묘지를 바라보면서 "내가 죽으면 저기로 갈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라" 라고

하셨어요. 그 소원을 아버님 돌아가신 지 17년 만에 이뤄드린 거죠. 

또 아버님이 공직자로서 꿈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경찰이 된다.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그것도 38년 만에 이뤄지게 된 거죠 (2018년 3월, 치안감으로 공식 추서 됐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2개는 이뤄드렸어요. 고맙고 감사하고 몹시 기쁘죠.  

 

 PD 간혹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신가요? 아버님께 하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안 그런 얘기 하죠. 

"아버님, 꿈에 그리던 치안감이 되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제 아버지를 알아주고 있습니다." 

요즘엔 또 그래요. 

"아버님을 따르던 부하 직원들의 사연도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제 좀 편히 계시라"라고 하죠. 

아버님이 별로 말씀도 없고 행동도 없었지만 보이지 않게 그분들에게 큰 애정을 줬더라고요 

그러니까 위급 상황에서 그 많은 경찰관들이 아버님의 지시를 거부감 없이 따르게 된 것 같아요   


호재 씨는 어디에서 누굴 만나든  5.18 당시 아버지와 뜻을 함께한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들을 "진정한 영웅"이라고 칭하면서 
명예 회복에 힘써달라고 부탁한다.
 
지난 2017년에는 함평 순직 경찰관들을 위한 추도식을 개최하고, 
경찰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한 것이다.

지난 2018년에는 그의 소개로 5.18 당시 발포명령을 거부해
파면당한 이준규 전 목포 경찰서장의 안타까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올해 경찰청은 5·18 당시 부당하게 징계를 받은 
퇴직 경찰관 21명의 징계처분을 직권 취소했고, 징계로 감소한 급여를 
소급 정산해 본인 또는 유족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또 이준규 서장은
뒤늦게 5.18 유공자로 인정받았고, 지난해 10월 재심에서 무죄 판정을 받았다.
지난 2019년부터는 경찰청이 주관하는 5.18 순직 경찰관 공식 추도식도 열리고 있다.

최근엔, 공직자 바로 세우기 운동본부와 안병하 인권 학교를 만들어
안병하 정신을 계승하는 공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호재 씨는 아버지가 못다 한 꿈을 하나하나씩 이뤄나가며
우공이산의 신화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40년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포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힘이 되어주고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차후에는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페이스북 <안병하 기념사업회>에 올린 안호재 씨의 글, 5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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