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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Jan 10. 2019

카스바의 내력과 마력

알제리 카스바 편

센트로에서 내려와 해안도로인 ‘체 게바라 로’를 따라 걷다보면 왼편에 또 하나의 언덕이 있다. 센트로와는 달리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끼고 남루한 집들이 밀집해 있는 산동네. 이곳이 바로 알제의 또 다른 명소 카스바(Kasbah, 성채)이다. 카스바하면 ‘카스바의 여인’이라는 성인가요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정작 카스바가 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카스바의 내력  

  

카스바는 16, 17세기 무렵 북아프리카에 지어진 성채였다. 당시 알제리 지역은 제대로 된 독립왕조 없이 지역 군벌과 바르바로이 해적이 장악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해적을 소탕하고자 이곳을 자주 공격했고, 이에 해적들은 해안가 산등성이 주변에 성벽을 두르고 그 안에 주둔지 겸 주거지를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벽은 사라지고, 토착민들에 의해 성 안의 주거지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남아있는 독특한 밀집형태의 산동네를 카스바라고 한다.

      

과거 이곳은 술집과 사창가가 많은 할렘이기도 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 <알제의 여인들>(1834)에서 볼 수 있듯, 유럽인들은 카스바를 이국적인 환락의 상징으로 여겼다. 식민지 시절이 그 절정이었다. 그랬던 카스바가 크게 변모한 것은 독립운동의 중심기지가 되면서부터였다. 알제리 독립투사들은 좁고 복잡한 카스바 안을 숨어 다니며 도심게릴라전을 벌였다. '역사상 가장 선동적인 영화'라 불리는 <알제리 전투>(1966)는 당시의 게릴라전을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으로 독립 직후 범국민적 지원을 받으며 알제 카스바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에서 소매치기였던 주인공 '알리'가 독립투사가 되기로 마음 먹자마자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카스바를 정화하겠어!"

카스바가 새로 태어나는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한 명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알제 카스바 입구 독립투사들의 모자이크 벽화와 영화 <알제리 전투>의 주인공들


겉보기에 카스바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전투가 아닌 서민들의 일상이 골목을 채우고 있고, 술집과 사창가는 카스바는 물론 나라 전체에 금지된 지 오래라 찾아볼 수 없다. 일찌감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관광지화 된 모로코나 튀니지의 카스바와 달리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 변하지 않은 풍경에 알제 카스바의 마지막 내력이 서려 있다. 암흑의 10년(dark decade, 1990~2000)이라고 하는 내전을 겪으며 최근까지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온 것이다. 유럽사람들조차 그곳에 다시 들어가기 시작한 지 불과 10여 년. 길고 참혹한 내전 탓에 알제리는 몇 안 되는 미지의 나라가 되었고, 그 덕분에 카스바는 시간의 흔적과 현지인의 일상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었다.     


카스바의 마력


카스바는 언덕 아래 시장으로 시작된다. 식료품, 잡화, 옷가게 등 작은 가게들이 양옆으로 빼곡하고, 상인과 손님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헐리웃 영화에 이런 시장골목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이 자주 나오는데 직접 가 본 카스바의 시장 골목은 영화에서 본 것 보다 훨씬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한마디로 시장골목 전체가 만원버스 같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좌판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상인들은 물건을 높은 문틀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물건을 보거나 사려면 가게 앞에 선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 와중에도 상인들과 현지인들은 낯선 동양인을 보고 같이 사진을 찍어자고 하며 말을 건다. 여자들을 쳐다보기도 조심스러운 바깥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남녀가 몸을 부대끼는 것을 피할 수 없고, 그 틈에 여인들도 낯선 동양인에게 호기심 어린 강렬한 시선을 던진다. 카스바에 들어서기 전에 안내인으로부터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그 속에서 정신줄을 잡고 있기란 쉽지 않다.   

카스바 입구의 시장골목

언덕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골목은 차츰 한적해 진다. 공예품, 서점, 중고가전, 이발소 같은 덜 번잡하고 정겨운 가게들이 나온다. 주인들은 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여행자들에게 안을 둘러 보라 권하고, 구경을 한 후 엄지손가락이라도 들어 보이면 함박웃음으로 악수하고 포옹한다. 


그렇게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빨려들어 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좁은 주택가 골목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아이들이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들락거리는 일상의 공간. 복잡하게 엉켜있는 조용한 골목길들. 수 백 년의 손때가 묻은 대문과 창문에 시선을 빼앗기고, 열린 대문 틈으로 어둑한 집 안을 엿본다. 볼 것이 너무 많아 어질어질하다. 카스바는 가난하지만 각박하지 않고, 복잡하지만 분주하지 않은 곳. 일상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는데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이상한 곳이다. 


그 안에서 나는 몇 번인가 길을 잃었다가 깜짝 놀라 서둘러 내리막길을 되짚어 내려오곤 했다. 그러다보면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낯익은 골목이 다시 나타났고, 이미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며 어제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난 듯 반갑게 인사했다. 짧은 시간 몇 번이고 같은 골목을 만나고, 사람들과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정이 드는 곳. 골목에 들어온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건만 마치 며칠이 지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곳. 내가 느낀 카스바의 마력이다.  


카스바의 사람들

불쑥 수많은 골방 중에 한 칸을 빌려 하릴없이 며칠을 지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치솟았다. 그대로 눌러 앉고 싶은 마음. 이것은 여행 중에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인 동시에, 시간과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여행자에게 치명적인 위험신호가 아니던가. 이번 여행에서는 그 순간이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올라가다가는 발목을 잡힐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에 서둘러 내리막길로 방향을 틀었다.  

    

내리막길은 짧았다. 내려와 버린 것을 곧바로 후회했지만 골목을 다시 찾아 가기엔 카스바는 이미 내게서 멀어져 있었다. 고백도 하지 못하고 혼자 접어버린 첫사랑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내려오는 내내 ‘다음번에는 꼭 현지인의 소개를 받아 이곳에 며칠 묵으리라, 옥상에 올라 모자이크 같은 카스바의 전망을 보고, 케차우아 모스크로 매일 기도를 하러 가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다음번’이라는 말만큼 허망한 말이 또 있을까. 

그것은 한발 더 가지 못한 게으르고 겁 많은 여행자의 핑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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