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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Jan 17. 2019

유럽을 강타한 '라이'

알제리 대중음악 편

알제리에서 알제리음악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음식점에는 음악이 없고, 카페엔 오직 축구중계만 있으며, 위성케이블TV에서는 프랑스 채널이 눈길을 끈다. 그곳의 일상 속에서 음악을 접하기 힘든 이유는 이슬람이 음주가무를 권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음주가무가 인간, 특히 젊은이들의 영혼을 타락시킨다고 여긴다.  


하지만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라이(Rai)’라 불리는 알제리 대중음악이 유럽과 미국에서 각광받는 월드뮤직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이다. 미국의 팝가수 '스팅’과 알제리가수 ‘쉐브 마미‘가 2001년 슈퍼볼 개막식에서 함께 부른 ’데저트 로즈 Desert Rose', 그리고 클럽음악의 강자 ‘핏불’과 알제리 국민가수 ‘쉐브 칼레드’가 2012년 함께 만든 곡 ‘히야히야 Hiya Hiya' 등이 대표적인 증거. 또 유럽에서는 알제리 가수와 유럽 유명가수들의 협연이 매년 성대하게 열리고 있기도 하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K-POP' 이전에 'Rai'가 있었다고나 할까.  


이슬람의 홀대에도 불구 알제리음악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사연과 다양한 가수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음악의 역사와 여러 가수를 한 번에 소개하려니 불가피 글이 길어지게 된 점 미리 독자분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음악 스타트!  


‘멜훈(Melhun)’에서 ‘라이(Rai)’로  


‘라이(Rai)’는 단순한 댄스리듬 위에 아랍식 멜로디와 창법을 얹은 혼종장르의 음악이다. 서구의 팝음악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변형한 음악으로, 알제리 국제도시 ‘오랑’에서 탄생해 현재는 마르세이유 등 이민사회를 주무대로 삼고 있다. 


‘라이’ 이전 알제리를 대표하는 음악은 ‘멜훈(Melhun)’이었다. '멜훈'은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의 민속음악인데, 아랍기타와 피리 등 간단한 반주에 맞춰 남자가수(쉐이카, cheikh)가 아랍식 창법(멜리스마 창법)으로 고전시가를 읊조리는 형태이다. 우리나라의 판소리나 병창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소란스럽지 않고, 격식을 갖춘 전통음악 멜훈은 사막에서 손님을 맞는 최고의 접대였으며, 보수적인 이슬람에서 유일하게 공인받은 음악이었다.     


멜훈의 대가 '쉐이크 하마다' (왼쪽 꿑)연주 모습

1890년대에 북아프리카가 식민지화되면서부터 비이슬람 음악, 즉 재즈, 샹송, 플라맹고 같은 유럽의 음악이 알제리에 들어온다. 종교와 민족 고유의 시가를 노래하는 멜훈과 달리 유럽의 음악은 리듬이 살아있고,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알제리의 지배층은 전통을 고수하고자 서구의 음악을 금기시했지만 서민들은 달랐다. 그들은 새로운 음악에 서민적인 감정과 정열을 담아내기 시작했고, 그렇게 ‘라이’가 탄생한다.    


‘라이’라는 말의 원뜻은 ‘관점, 시각’이다. 사막의 유목민들은 고민이 있을 때 현자들을 찾아가 인생상담을 했고, 현자들은 항상 ‘야, 라이...(Y Rai, 내 생각은...)’라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대로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음악에서도 의미를 중시하는 이슬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한편, 가수를 부족의 멘토와 같은 존엄한 존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유목민은 그들의 현자들을 ‘쉐이크Cheikh(남성)’, ‘쉐이카Cheikha(여성)’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그대로 가수를 부르는 존칭이 되어 현재까지도 가수들의 이름 앞에 성처럼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쉐브 칼레드'는 '가수 칼레드'라는 의미인 것이다.


‘라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업적은 아랍고유의 창법과 멜로디가 살아있는 대중음악을 만들어냈다는데 있다. 반복적인 리듬, 음을 늘어뜨리며 꺾는 창법은 일단 적응만 하면 다른 음악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흥겹고 개성적이다.


그 대표적인 가수로 '쉐이카 리미티’, ‘쉐브 칼레드’, ‘자말 알람’이 있다. 각각 '라이'의 탄생, 세계화, 서정성을 상징하는 가수들로 그들 자체가 '라이'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흥겹기만 한 이 음악이 실은 처절한 눈물과 희생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라이의 여왕 ‘쉐이카 리미티’ 

‘쉐이카 리미티(Rimitti 1923-2006)’는 ‘라이의 여왕’, ‘라이의 할머니’로 불린다. 그녀는 종교와 여성이라는 이중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라이를 대중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설적인 여가수이다. 리미티는 식민지시절 고아로 자라면서 먹고 살기위해 노래를 했다. 여성이 남녀 대중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그녀는 다른 재주가 없어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센트로의 캬바레와 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했다.         

그녀는 다른 여가수들과 달리 여성들이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맘속에만 감춰왔던 가난과 본능과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한 노래들을 불렀다.     


“혼자 자니 옆구리가 움츠러들어요. 나를 뜨겁게 해줘요, 나를 감싸 줘요.” 

(가사인용 및 내용참고 : 서울대학교 정지용의 논문 ‘라이-저항의 역사’)

    

그녀는 이슬람 치하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는 은밀히, 그러나 빠르게 대중 속으로 퍼져갔다.     

  

성(姓)씨를 감춘 채 ‘사이다’라는 이름으로만 활동하던 그녀의 인생은 쉐이카(남자가수) ‘모하메드 울드 에넴스’와 결혼을 하면서 크게 바뀐다. 음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결혼을 계기로 대중 앞에 나서게 된다. 그녀의 이름이 ‘라미티’가 된 재미있는 일화는 그 변화의 현장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어느 술집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고 박수를 쳤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술을 한 잔씩 돌리고 싶어 가게 주인에게 프랑스어로 ‘한잔 더, 한잔 더’를 외쳤다. 프랑스어가 짧았던 그녀는  ’remettez-moi un verre(술 한 잔만 주세요)’ 라는 완전한 문장 대신 “remettez, madame, remettez”(한 잔 더, 한 잔 더)라고 외쳤고, 그 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그녀에게 “가수 리미티 chanteuse Rimitti”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이름은 ‘리미티’가 되었고, 이후 더욱 과감한 노래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잔이 나한테 오게 내버려 두세요. 잔을 돌리는 것은 좋은 일이예요.”    


사회적 금기에 거침없이 맞섰던 그녀의 태도는 그대로 알제리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무장투쟁과 알제리독립을 독려하는 노래를 부르며 프랑스 경찰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고, 이로써 그녀와 그녀의 음악은 부도덕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쉐이카 라미티'는 그렇게 존경받는 최초의 라이가수이자 여성가수로 길이 남게 되었다.   

       

그녀의 뒤를 잇는 여성가수로 ‘자후아니아 Zahouania’가 있고, 최근 가장 각광받는 여가수로는 ‘수아드 마씨 (Souad Massi)’가 있다. 1972년 생인 ‘수아드 마씨’는 1997년부터 하드락 밴드를 결성해 사회성과 저항의식이 강한 노래를 부르며 유명해졌다. 히잡을 거부하고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던 그녀는 당국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강력한 메시지, 시적인 가사, 포크와 플라맹고와 아랍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감미로운 선율의 그녀는 알제리의 ‘존 바에즈’라 불린다.

    

2001년 노테르담의 ‘월드뮤직엑스포’에서 “침묵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를 승리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알제리의 민주화를 염원했던 그녀. 정치의식과 음악성을 겸비한 ‘수아드 마씨’는 월드뮤직 애호가라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알제리 뮤지션이다. 


세계를 강타한 국민가수 ‘쉐브 칼레드’  

라이는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 독립 이후에도 줄곧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이슬람 관습에 위배될뿐더러 식민의 잔재로 여겨졌기 때문. 많은 가수들은 예술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에서 활동해야 했다. 1970년대, 프랑스의 라이는 더욱 대중적인 음악으로 변모했고, 알제리 이민자 사회를 기반으로 서서히 프랑스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민자의 음악 라이가 알제리 국내에서 불리어지게 된 계기는 1988년 있었던 ‘알제리 학생운동’ 이었다. 독립 이후 걸출한 지도자 ‘우아리 부메디엔(1965~1978 재임)’ 대통령 재임기에 고속성장을 한 알제리는 부메디엔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정부패, 유가급락, 대규모 실업사태가 계속되자 학생들은 사회주의 정부를 상대로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거리의 학생들이 합창한 노래는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라이가수 ‘쉐브 칼레드 Cheb Khaled’의 '엘 하르바 완?(El Harba Wayn? / to flee, but where?)‘이었다. 우리말로 “도망쳐, 그런데 어디로?" 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는 막다른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서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독려했고, 이로써 이민자의 음악 '라이'는 국민음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어디로 갔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어디 있나?

부자들은 배가 불러 터지고

가난한 자들은 죽도록 일하는구나.

이슬람 광대들은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 결론은 뭐지? 우리는 알고 싶어.

너는 언제나 울거나 한탄하거나

도망칠 수 있어. 그런데 어디로?    

- 쉐브 칼레드의 '도망쳐, 근데 어디로?'의 가사


알제리 학생운동 이후,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처음 치뤄진 자유 총선거에서 사회주의 여당은 강경 이슬람 야당에게 패배했다. 선거에 패배한 여당이 정권을 넘기지 않고 버티자 이슬람 강경파가 반발했고, 이에 사회주의 여당과 군부가 계엄령을 발동, ‘암흑의 10년’이라고 불리는 ‘알제리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한편 라이는 조국에서의 호응에 힘입어 연이어 세계적인 히트 곡을 쏟아냈다. 1990년 이후 칼레드가 발표한 ‘디디(DiDi)'와 ’아이샤 (Aisha)‘가 유럽은 물론 인도 등의 제3세계를 강타한 것이 그것이다. 칼레드는 프랑스 팝 차트 1위, ‘프랑스 올해의 노래‘를 수상하는 한편, 인도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그렇게 그는 국제적인 가수로 도약하였고, 라이는 국제적인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라이는 탄생 80년 만에 정부로부터 알제리음악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쉐브 칼레드는 탄탄한 발성, 뛰어난 리듬감각, 폭넓은 음악세계로 현재까지 국민가수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후예들로는 ‘자후아니아’의 남편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암살당한 ‘라이의 왕자 쉐브 하스니 Cheb Hasni’, ‘라이의 어린왕자’로 불리는 미성의 알제리 이민 2세 ‘쉐브 포델(Faudel)’, 그리고 락음악 색채가 강한 ‘라쉬드 타하Rachid Taha’ 등이 있다.     

 

특히 칼레드와 포델, 타하가 파리에서 15,000 관중과 함께 민족영웅에게 바치는 노래 ‘압델 카데르 Abdel Kader’를 부른 공연은 알제리 음악사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 최근에는 기존의 라이 곡들을 일렉사운드로 리믹스한 DJ들의 클럽앨범들이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며 알제리 음악의 놀라운 장르 흡수력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중이다.   

     

음유시인들  

일반적으로 라이는 칼레드 류의 댄스음악을 지칭하지만, 알제리 국내에서는 포크나 인스트루멘탈 계열의 서정적인 음악도 라이라고 부른다. 대중적인 장르가 아닌 관계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랍선율이 가미된 알제리의 서정적인 음악은 매혹적인 음색, 견고한 연주로 7,80년대 남미의 음유시인들에 버금가는 순도 높은 감성을 전한다. 알제리 태생 프랑스 샹송가수 '엔리케 마시아스(앙리 꼬마사스)'의 초기음반이 이 계열의 음악이다.


이 씬에서 가장 돋보이는 가수는 ‘알제리의 밥 딜런’, ‘카빌리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자멜 알람(Djamel Allam)’이다. 그는 '카빌리(Kabylie)' 출신의 대표적 가수로 카빌리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카빌리는 동북부 산간 지역에 거주하는 북아프리카 백인 원주민인 베르베르계 소수민족으로 현재까지도 고유문화와 언어를 고수하고 있는 독특한 민족. 독립전쟁 당시 이간책에 속아 프랑스에 협조했다가 전후 양쪽 모두로부터 차별을 받은 불운한 민족으로, 축구선수 '지단'의 부모가 바로 카빌리 출신이다.) 


1947년 카빌리에서 태어난 '자멜 알람'은 20살 무렵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건너가 기계공으로 일을 하며 통기타를 들고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데뷔앨범 ‘Laissez-Moi Raconter(이야기하게 내버려 둬)’ 가 전 유럽에서 반응을 얻으며 유명해졌고, 최근에도 프랑스에서 가수 겸 영화감독 겸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초기 라이의 낭만적인 흥취를 만끽할 수 있는 ‘쉐이크 벤피사 Cheikh Benfissa’,  트럼펫 연주자로 시작해 재즈와 라이의 절묘한 조화를 성취한 ‘메사우드 벨레모 Messaoud Bellemou‘, 포크가수로 시작해 국민작곡가 반열에 오른 ’이디르 Idir'와 같은 장인적인 음악가들도 있다. 또 헐리웃 영화배우 '소피아 부텔라'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라이 작곡가 출신 영화음악가 '사피 부텔라 Safy Boutella'도 있다. 그들은 탁월한 연주력과 음악성으로 ‘라이’의 품격을 지켜가고 있는 장인들이다. 낯선 댄스리듬에 적응하기 힘든 분들, 알제리의 영혼을 더 진하게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음유시인들의 음악을 권한다. 


음주가무가 금지된 음악의 불모지에서 화려하게 '라이'를 꽃피운 알제리의 가수들. 그 낯선 이름들을 다시 불러본다. 쉐이카 리미티, 자후아니아, 쉐브 칼레드, 쉐브 하스니, 쉐브 포델, 자말 알람, 쉐이크 벤피사, 메사우드 벨레모, 이디르, 사피 부텔라, 수아드 마씨...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막의 장미(desert rose)'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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