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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Jan 03. 2019

프랑스의 야망을 덮다

알제리 센트로 편

프랑스 식민지의 근대유적, 센트로


알제리의 수도 알제(Alger) 시내의 중심가를 '센트로(Centro)’라고 부른다. 식민지시절 건설된 유럽식 도심 알제는 프랑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이 영원한 식민 지배를 확신하며 남미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건설했듯, 프랑스는 영원한 아프리카 지배를 꿈꾸며 알제에 센트로를 건설했다. 


센트로는 전체가 하나의 공원 같다. 아치로 장식된 하얀 빌딩들, 사이사이의 오르막길과 계단들, 너른 광장과 공원들... 그 어디서나 도시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바라다 보인다. 백 년 전 새하얀 고층건물 사이로 잘 차려입은 프랑스인들이 풍요와 낭만을 즐겼던 센트로는 지금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도시의 중심으로 쓰이고 있다. 



1911년 알제 파스뙤흐가 전경을 담은 엽서사진


언뜻 보기에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식민의 유산을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알제리인의 피땀으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오래 된 건물을 자기식대로 활용하는 것이 유목민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건물을 쉽게 부수지 않는다. 성당을 부수는 대신 이슬람 장식을 새겨 넣어 자신들의 신전으로 쓰고, 일반주택들도 옥상에 기둥과 철근을 빼둔 채 살다 자식이 결혼을 하면 한 층씩 올려지으며 증축해갈 정도로 건물을 아낀다.   


그러니 완벽하게 지어진 센트로를 밀어버리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식민의 유산을 마냥 자랑 할 수도 없는 노릇. 알제리 사람들은 센트로에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런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선택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거리와 건물과 광장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식민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 이름을 다 불러보거나 알 수는 없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될 만한 광장 두 곳을 둘러보자. 동병상련의 역사를 통해 알제리와 쾌속으로 친숙해지는 시티투어가 되기를 바라며... 출발!
    

사르 알 부지드 광장


사르 알 부지드 광장


센트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너른 광장이 있다. 센트로의 센터라고 할 수 있는 중앙광장이다. 아랍식 아치가 인상적인 중앙우체국 건물이 주인처럼 버티고 서 있고, 노천카페와 가로수가 테두리를 치고 있다. 이 광장의 이름은 애초 ‘잔다르크 광장’이었다. 광장 중앙에 잔다르크 동상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이곳의 정식명칭은 ‘사르 알 부지드 광장’이다.

    

때는 1945년 5월 8일. 나치독일의 점령에서 벗어난 프랑스인들은 파리에서 축제를 벌였다. 그리고 같은 날 알제리 인들은 이 중앙광장에 모여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아프리카 식민지의 관문인 알제리를 포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비무장의 알제리 시민들을 향해 즉시 발포했다. 이때 알제리 국기를 손에 들고 있던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가 총에 맞아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알제리 국민의 저항은 격화된다. ‘알제리 전투’라 불리는 독립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날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치의 학살에서 파리가 해방된 날 프랑스는 학살을 시작했다.’라고.    

 

1962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한 알제리 인들은 중앙광장의 잔다르크 동상을 끌어내려 참수하고, 광장에 소년의 이름을 붙였다. 프랑스 소녀영웅 대신 알제리 소년영웅을 기억하기로 한 것이다. 


카데르 광장


카데르 광장


‘사르 알 부지드 광장’에서 싱그러운 꽃시장 길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면 또 하나의 작은 광장을 만나게 된다. 관공서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 중앙에 큰 칼을 치켜든 어느 장군의 기마상이 있다. 동상을 잘 세우지 않는 이슬람 전통에도 불구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기념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이름은 ‘압델 카데르 (Abdel Kader al Jazairi, 1808-1883)’. 그래서 광장 이름도 ‘카데르 광장’이다. ‘알제리 민족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최후까지 대항한 전쟁영웅이다.     

 

이곳은 원래 프랑스의 장군 ‘로베르 뷔조 (Thomas Robert Bugeaud 1784-1849)’의 동상이 있는 ‘뷔조 광장’이었다. 뷔조는 쉽게 말해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인물로 식민전쟁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알제리총독이었다. 압델 카데르와 뷔조는 식민전쟁의 양측 사령관으로서 지난하고 처절한 혈전을 벌였다.   

  

1830년 6월. 프랑스는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기로 마음먹고 알제리를 침공, 압도적인 전력으로 순식간에 알제를 점령했다. 당시 알제리는 오스만제국의 속령이었고, 이 지역의 태수는 싸워볼 엄두도 내지 않고 알제를 프랑스군에 헌납했다. 이에 알제리의 토착부족들이 나서 저항군을 조직, 24살(1832년)이었던 압델 카데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령관(아미르)으로 선출되었다.


전쟁 초기 카데르의 저항군은 유목민 특유의 게릴라전술로 프랑스군을 지치게 했고, 급기야 프랑스군이 먼저 휴전을 제안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다. 휴전은 사실상 카데르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때 카데르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만이라도 새로운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매진했다. 비록 건국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알제리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한 최초의 적극적인 시도였다. 그가 '민족의 아버지'인 이유이다. 


한편 프랑스로 돌아간 뷔조는 몇 년 후 강경파가 득세한 틈을 타 전쟁을 재개했다. 그의 새로운 전략은 ‘초토화 작전’. 게릴라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무차별 살육하기 시작한 것이다. 300만이었던 알제리 인구가 200만으로 줄어들었다고 할 정도로 참혹한 학살이 8년 간 계속되었고, 압델 카데르는 끝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데르는 케차우에 모스크에서 거행된 항복식에서 뷔조에게 자신의 칼을 바쳤고, 그의 항복으로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압델 카데르와 로베르 뷔조


120년 후, 독립을 쟁취한 알제리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배지 시리아에 있던 압델 카데르의 유해를 송환해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뷔조의 동상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압델 카데르의 기마상을 세웠다. 카뮈가 나온 ‘뷔조 고등학교’도 ‘압델 카데르 국립중등학교’가 되었다. 두 사람의 기나긴 악연이 뒤늦게나마 압델 카데르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소녀영웅엔 소년영웅으로, 전쟁영웅엔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바꾸었듯이 센트로의 이름들에는 다 이유가 있다. 지중해가 가장 잘 보이는 언덕길의 이름은 ‘프란츠 파농 가’.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 출신 흑인 정신과 의사로, 알제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해방 직전 병사한 지식인이다. 프랑스와 가장 가까운 언덕길에 그의 이름을 붙여 준 것에서 그에 대한 알제리 인들의 애정과 배려를 느낄 수 있다.    


한군데 더. 시내를 둘러싸고 바다와 접해있는 해안도로의 이름은 ‘체 게바라 로’. 제3세계 독립전쟁의 상징인 그를 기억하기위해 쿠바 아바나의 해안도로를 닮은 이곳만한 곳은 없을 것이기 때문.   

         

있었던 과거를 지울 수는 없다. 치욕적인 역사유적을 파괴하는 대신 새로운 이름으로 자력독립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한 그들의 선택은 매우 현명해 보인다. 이국적인 카페와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그 이름들을 곱씹어 보는 것은 어떠신지. 이름을 불러주면 그들은 언제나 한달음에 우리 앞으로 달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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