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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Oct 12. 2021

"나 누리길에 중독된 것 같아"

평화누리길 9코스 - 율곡길

의식으로서의 걷기


"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

- 백범 김구


남북 통신선이 다시 연결되었다. 반가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평화누리길을 떠올린다. 내가 그 길을 걷는다고 더 빨리 통일이 올리야 없겠지만 간절한 마음을 달랠 별다른 방법이 없기에 또 그곳으로 향한다. 그 길을 걸으며 마음 속의 38선을 지운다. 나에게 평화누리길 걷기는 하나의 의식이자 순례이다.



풍경 속으로


9코스 율곡길은 율곡생태습지공원에서 장남교까지(19km)의 길로 파주의 네 구간 중 마지막 구간이다. 걷는 내내 임진강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걷는다는 점에서는 8코스와 비슷하지만, 두 코스는 여러모로 대조를 이룬다. 8코스의 임진강은 반구정과 화석정의 탁트인 전망이 시원하고, 강둑을 따라 둘러쳐진 철조망 너머로 흘러 아득한 느낌이다. 반면 9코스의 임진강은 훨씬 가깝고 웅장하다. 사라진 철조망을 대신해 들판과 풀숲이 둘러쳐져 있고, 종착지인 황포돚배 나루에 이르면 마침내 임진강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8코스에서 바라만 보았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 9코스이다.



누리길의 종착점


중간고사가 끝난 딸아이와 함께 경의중앙선을 탔다. 지하철에서 9코스의 이모저모를 찾아보다 종착점인 '장남교'에는 대중교통이 없어 40분을 다시 걸어나와 황포돛배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련없이 오늘의 종착점을 그냥 황포돛배 나루로 하기로 했다. 대중교통이 연결되는 황포돛배를 그냥 종착지로 할 것이지... 누리길을 만들 때 파주와 연천 간의 알력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연천군 쪽에서 10코스의 출발지를 조금이라도 군경계 가깝게 당겨놓으려 한 게 아닌지 싶은데, 도보길이니 만큼 지금이라도 대중교통 이용이 편한 곳으로 종착점를 옮기는 게 좋을 듯하다.


황포돛배 나루에서 바라 본 9코스 종착점 장남교


문산역

    

세번 째 만나는 문산역이 이젠 꽤 낯익다. 읍내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브레드 킹 제과에서 간식거리로 빵을 샀다. 오늘이 장날인지 버스정류장이 붐빈다. 92번 버스를 타니 도로 위도 붐빈다. 나중에 알고보니 곳곳에 자리한 캠핑장때문이었던 듯. 안과 밖이 모두 붐비는 버스를 견딘 끝에 율곡수목원 정류장에서 내렸다. 9코스 시작점은 율곡생태습지공원인데... 정거장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두 정거장이나 지나서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율곡습지공원의 코스모스가 유명하다는 정보가 있었으나 굳이 되돌아가지 않기로 하였다. 코스모스는 길가에도 많았으므로.      


문산 읍내


자연의 기운


영글대로 영근 벼이삭 가득한 들판너머 얼핏얼핏 임진강이 보인다. 전곡리 선사유적의 발굴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정착지임이 증명된 임진강 유역. 철조망 너머의 임진강은 전쟁의 강이었으나 가을 들판 너머 진한 흙빛의 강물에서는 강한 생명의 힘, 원시의 힘이 느껴졌다. 


임진강 뿐만 아니라 9코스의 모든 길에서 풍요와 원시의 힘이 느껴졌다. 잘 가꾼 논과 밭은 어김없이 열매로 가득했고, 손을 놓아버린 농경지는 삽시간에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짧은 산행에도 깊은 숲을 느낄 수 있고, 축축한 기운이 가득한 음산한 골짜기도 있다. 길은 분명 잘 정비되어 있는데, 갈라진 도로 사이를 비집고 풀이 돋아나고 있고, 오래된 통나무 벤치에서는 기어코 버섯이 피어난다. 역시 자연은 힘이 세다. 인간의 손길이 뜸해지자마자 자연이 그 경계를 먹어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적벽길


들판을 지나면 적별길이다. 이름은 적벽길이나 적벽 위로 나 있어 적벽을 볼 수 없는 길. 잘 정비된 산책로를 발 밑의 절벽을 상상하며 걸었다. 끝내 적벽을 보지 못할 줄 알았으나 우리는 끝내 적벽을 보았다. 황포돛배 나루에 도착했을 때 마침 배시간이 맞았고, 허겁지겁 표를 끊어 배에 올랐다. 반구정에서 40km 가까이 걸어오는 동안 멀리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던 임진강에 드디어 몸을 싣는다 생각하니 감계가 무량했다. 더구나 그곳에는 상상만 하며 걷던 발 아래의 원시의 절벽도 있었으니... 기대치 않았으나 절대 놓칠 수 없는 어트랙션이었다. 



수많은 상처를 황혼이 감싸주었기 때문일까. 절벽 사이로 흐르는 강물에 몸을 싣자 일순 마음이 평온해졌다. 거대한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자연 속에 들어갔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안도감 같은 게 밀려왔다. 


고작 70년 분단이 대수인가. 높은 산, 너른 강을 경계로 삼는 일은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 절벽 이편과 저편이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고, 적대감이 쌓이면 한번 승부를 보자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옛날의 원시인들도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욕하고 훔치고 죽고 죽이는 싸움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거대한 자연이 만든 경계선을 두고 인간들이 싸우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인간이 더 이상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지 않은 지 오래 된 지금, 자연이 경계가 될 수는 없다. 이제 이 지구상에는 거대한 감정의 골, 욕망의 골만이 남아 있을 뿐. 마음의 38선을 지우면 땅 위의 38선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땅 위의 철조망 쯤이야 놔둬도 자연이 삽시간에 먹어치워 버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자연을 오래오래 보듬어야 할 것이고... 다시 서로의 마음을 열기 시작한 지금, 오직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지금은 용기가 곧 지혜인 것이다.


돌아오는 길


볼 것없이 험하기만 한 7코스, 아기자기하고 예쁜 8코스, 그리고 생명이 넘치는 9코스를 걸어 온 딸아이가 버스를 기다리며 한 마디 한다.


"나 누리길에 중독된 거 같아."


다음 10코스부터는 연천이라 1박2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것도 좋단다. 이제 혼자만의 고독한 순례는 끝난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같이 여행을 갔을 때는 30분 걷기도 힘들어 하던 아이가 20km를 걷고도 나보다 멀쩡한 것이 대견스럽고, 무엇보다 아빠와의 길고 지루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아줘서 고맙기만 하다. 나에겐 의식과도 같은 평화누리길이 입시생활에 찌든 아이에겐 어떤 길로 기억되고 있을지... 궁금하지만 스스로 말할 때까지 물어보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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