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화누리길 철원 1코스 - 금강산길 (1일차)
< 1일 차 >
경기도 평화누리길 13코스 : 신탄리역 - 역고드름 (옛 경원선 교량)
강원도 평화누리길 1코스 : 역고드름 - 백마고지역 - 소이산
일 년만의 순례
경기도 평화누리길 12개 코스를 마치고 드디어
강원도 평화누리길에 오른다
희망과 미래로 가득했던 이 길
불과 일 년만에 슬픔과 광기로 물들어 있다
발목을 움켜잡은 낭패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나를 위해, 살기 위해 다시 걷는다
평화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순례길
이 길을 다 걷기 전
평화에 소용이 되는 작은 일 찾게 되기를.
걷기, 사는 연습
뒤돌아 보지 않기
너무 먼 곳을 바라보지 않기
내 앞의 바람과 하늘과 풍경을 느끼며
가장 가까운 목적지를 향해
한 발 한 발 멈추지 말고 걷기
그렇게 살아가기
경원선
경기도 평화누리길 13코스는 도 경계선의 자투리 구간
연천에서 철원으로 넘어가는 텅 빈 길
영원한 수탈을 꿈꾸던 일제가 남겨놓은 미완의 경원선 유적인
역고드름과 차탄천 옛 경원선 교량을 지난다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서울에서 원산, 거기서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향하는 열차가 분주히 오갔을 이곳
곧 열릴 것만 같던 그 길에
한 겨울 고드름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감돈다
일왕이 항복을 하던 그 날 아침까지도
개통을 위해 채찍을 휘둘렀을 일제 앞잡이들과
태어날 때부터 일본놈 세상
꿂주린 채 강제노역에 시달렸을 청년들의 마지막 흔적
아무리 한 치 앞 모를 게 세상 일이라지만
대명천지 일제 앞잡이들이 대놓고 활개를 치는 시절을
내 생전에 만날 줄이야
분단의 종식 없이는 식민의 역사도 끝나지 않는다는 교훈
뼛속 깊이 새겨야 할 터.
강원도의 길
걸어보면 안다
고개 하나를 두고 산천과 생활이 얼마나 달라지는 지를.
산비탈의 돌밭을 일구는 농부
손대지 않으면 풍경으로 돌아가는 자연
논밭 가장자리 깻잎 대신 자라고 있는 옥수수
금지된 숲들을 옆으로
구비구비 돌아가는 오르막 길
민통선을 위로 올린 덕에 열린 강원도의 길들
부디 난개발을 피해 잘 보존 되기를
백마고지역
희망찬 교류의 현장이었던 백마고지역
문을 닫고 깊은 잠에 빠져 있고
기운 차게 뻗어가던 철로 싹뚝 끊긴 채
평화와 함께 녹슬어 간다
소이산
무거운 마음 달랠 전망을 찾아
누리길 옆길에 있는 소이산으로 올라간다
산 정상은 고작 362미터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와 북녘 땅이
온 사방에 활짝 펼쳐져 있다
2박3일도 마다하지 않을 누리길 최고의 장관을
겨우 30분 오르고 마주하게 되다니...
과분한 선물을 받아들고 안절부절 정상을 맴돈다
먼 산은 구비구비 바다도 없이 막혀 버린 다도해
들판 사이 작은 봉우리들 모두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
그 어떤 말로도 전할 수 없고
그 어떤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는
먹먹한 풍경을 향해 앉은 수녀님들
나즈막히 찬송가를 부르며
평화를 바라는 미사를 올린다
오늘의 기도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의 기도가 한 자리에 모이는 날
세상을 바꾸고 평화가 올 지니.
인솔을 나오신 국경선 평화학교 정목사님의 해설을 엿듣는다
철원 비무장지대 주민들의 애환과 우여곡절들
소이산에서 노력 없이 너무 많은 것을 얻고 있다
돌아와서 국경선 평화학교에 대해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정목사님은 평화학박사로 퀘이커교를 공부하기 위해 영국에 갔다가
철원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빈 손으로 무작정 와서
미래 평화 일꾼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건립하고
3년 정규교육과정과 각종 평화행사를 운영 중이시라고.
불굴의 실천정신을 뒤늦게 알고 존경심이 솟는다
계절마다 2박3일 평화누리길 걷기 행사도 하신다니
올 가을 행사에 참여해 다시 인사를 드리리라 마음 먹는다.
결심
전망을 보자마자 강렬한 신호가 온다
아, 이것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구나
이런 곳에서 밤을 보내지 않는다면
먼 길 무거운 텐트를 지고 올 이유가 없다
그렇게 겨우 다섯 시에 잘 곳을 정하고
보나마나 야영금지 일 것이 뻔한 이곳의 분위기를 살핀다
다행이 오늘은 감시가 느슨하다
모노래일을 타고 온 관광객 몇 팀이 다녀가고
직장동료 여성분들이 다녀가고
물 한 병 없이 갑작스레 산 위에서 자기로 한 나
맛이 살짝 가기 시작한 김밥 두 줄을 먹고
먹던 생수를 구걸해 받아 마시며 일몰을 기다린다
일몰
연천 쪽으로 해가 기운다
짧았던 각자의 하루가 끝나는 하나의 풍경
내가 어떤 하루를 보내건 간에
시간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빛과 어둠의 향연
어린이에게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게 하라고 하신
소파 방정환 선생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본다
해가 지고 빛이 채 사라지지 않은 시간 올라 오신
소이산 아래 사는 어르신 부녀
어르신은 365일 중 350일을 여기에 오시는데
한 번도 같은 풍경이었던 적이 없고, 질리지도 않는다고 하신다
전쟁 이전부터 여기에 사신 그 어르신은
38선 이북지역에서 살면서 겪은 특별한 경험들을
소나기 퍼붓듯이 우수수 쏟아 놓으신다
정말이지 오늘은
들인 공 없이 너무 많은 것을 받고 있다
별
어둠이 내려 앉자
민통선 초소의 불빛들이 줄을 치고
하늘엔 별이 하나 둘 뜬다
달도 없는 그믐 밤
정상에 누워 하늘을 가득 매운 별들을 본다
무질서하게 뿌려진 별들을 이어 모양을 만들고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 붙인
고대인들의 상상력이 경이롭다
별을 보고 밤길을 짚어가야 했던 그들에게
이야기는 별자리를 기억하게 하는 생존의 수단이었을 테지
별들 만큼이나 많은 세상의 이야기
죽기 전까지 하나라도 제대로 받아 쓸 수 있을까
내가 누운 자리
정상 아래 벤치 사이 자리를 펴고 눕는다
예상 밖의 아늑함
그러다 툭
바람이 텐트를 밀어 정수리를 치는 순간 깨닫는다
이곳이 남북의 수많은 청년들이 처참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곳이라는 것을
지금 나는 그들과 함께 누워있다는 것을
울컥 밀려오는 슬픔과 연민으로
감은 눈 밑이 뜨거워진다
그대들 평안하게 계신가요?
잠시 옆에 눕겠습니다
바닥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온기
짧지만 깊은 잠 자고 가라고
꿈 속까지는 오시지 않은
그대들의 영혼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