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평화누리길 3코스 <화강길>
강원도평화누리길 3코스 <화강길> : (도창검문소) - 쉬리공원 - 백골신병교육대 - 자등 119지역대
1코스 철원평야와 소이산에서의 하룻밤, 2코스 한탄강을 따라 국제두루미센터까지 걸으며 철원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번에도 1박2일 예정으로 떠났다. 어디서 자게 될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두 열어둔 채 일단 지난 번 멈춘 그곳으로 향했다.
최후의 안전핀
언젠가부터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이 돌덩이를 얹은 듯 무겁기만 하다.
평화는 고사하고 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기 때문.
"9.19 평양공동선언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부속합의서로 채택된 남북군사합의서 였습니다...
남북군사합의를 폐기한다는 것은 최후의 안전핀을 제거하는 무책임한 일이 될 것 입니다."
- 문재인 전대통령. 9.19 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9.19군사합의 폐지를 주장하는 친일극우 인사가 국방부장관 후보가 되었고,
문 전대통령은 퇴임 이후 처음으로 상경하여 깊은 우려를 표했다.
과연 9.19 군사합의가 뭐길래 최후의 안전핀이라고 하는 것일까?
남북 평화를 제대로 맞이하고자 평화누리길을 걷기 시작했으면서도,
정작 평화로 가는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다.
죽은 자식 뭐 만지는 심정으로,
평화의 기운 다시 불끈 솟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합의문을 찾아본다.
9.19 군사합의는 6가지 합의사항과 그에 따른 세부조치사항들로 되어 있다.
1. 육해공 모든 공간에서 남북의 충돌을 발생시킬 수 있는 모든 적대행위 전면 중지
(정찰, 침범, 공격 금지, 항해나 비행방해 금지...)
2.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적 대책을 강구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철수 및 비무장화, 공동 유해발굴 및 역사유적 발굴)
3.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대책 마련
(평화수역과 시범적 공동어로 구역 설정, 불법 어로행위 공동대응)
4. 교류협력 및 접촉 왕래 활성화에 필요한 군사적 보장 대책을 강구
(통행 통신 통관, 철도 도로연결, 해주와 제주해협 직항로 개방, 임진강 하구 공동이용)
5. 상호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다양한 조치들을 강구
(직통전화,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설치와 공동사업 정기적 점검)
6. 이 합의서는 쌍방이 서명하고 각기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그 문본을 교환한 날부터 효력이 발생함
(2018년 9월 19일)
하나만 성사 되어도 대사건이 될 저 많은 사업들이 동시진행되었었다니... 모든 게 꿈만 같다.
전임 대통령이 오랜 칩거를 깨고 참석한 공식석상에서 군사합의를 언급했다는 것은
군사적 충돌의 조짐이 뚜렷하게 있다는 반증일 터,
지난 대북사업들을 범죄시하고,
극우친일 인사들이 통일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되는 세상에
최후의 안전핀이 뽑히지 않다는 보장이 없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상한 시대가 다시 왔다.
끊어진 길
지난 번 빠져나왔던 국제두루미센터로 가기 위해 동송행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그때 뵈었던 양지리이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불쑥 떠올랐다.
"이길리부터는 원주민만 갈 수 있다는 거 같던디..."
그래도 누리길이 나있으니 무슨 방법이 있겠지... 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났다.
혹시나 하고 검색을 해 보니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평화누리길 2코스 끝지점인 이길리검문소부터 3코스 도창검문소 사이 6km 길이
몇 년 전 홍수로 유실된 후 아직도 복구되지 않아 무기한 출입통제 상태란다.
지도에도 길이 지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피해가 매우 심했던 모양.
고작 6km의 길이 끊겼을 뿐인데, 이 검문소에서 저 검문소까지 버스로 가려면
다시 양지리로 나와 2시간 이상 걸리게 생겼다.
한마디로 10분 갈 길을 2시간 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 사라졌으므로 느리고 불확실한 다른 여러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평화누리길을 박음질하듯이 발로 잇겠다는 집착 따윈 없으므로
2코스와 3코스의 연결부를 건너 뛰고 이름만 들어도 대중교통이 많이 다닐 것 같은
3코스 중간의 쉬리공원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한 번 꼬인 길은 제 길로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동송읍은 구 철원, 쉬리공원은 김화읍 쪽이었다.
김화군은 삼팔선 이북지역으로 해방 직후엔 북한 땅이었으나
전쟁 후 일부를 남한이 점령하게 되면서 철원군으로 통합 되었다.
동송터미널에서 쉬리공원까지 한 번에 가는 농촌버스가 없을 정도로
같은 철원군이지만 지리적으로는 완전 다른 동네다.
쉬리공원으로 갈 것이었으면 애초에 김화읍 와수리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야 했음을 나중에 알았다.
산골마을 하나하나 거쳐가는 농촌버스 덕분에
여러 산골마을들을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으나
걷기를 시작하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고작 한 두 시간 돌아가는 길도 이리 먼데
평화로 가는 길을 완전히 끊어 버린 지금의 일 분 일 초가
훗날 얼마나 길고 긴 시간, 멀고 먼 길이 되서 되돌아오게 될 지 아득했다.
되찾은 이름, 화강
집에서 나와 다섯시간 만에 오늘의 출발점 쉬리공원에 도착했다.
철 지난 유원지가 된 공원은 썰렁하기만 했으나 상관없었다.
이제 걷기만 하면 되니까.
꼬이고 꼬인 길을 돌아온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도보길이 화강(花江)을 따라 너무도 편안하게 조성되어 있다.
한탄강 제 1지류인 화강은 십 여년 전까지 남대천으로 불리웠고,
지금도 남대천교 등 곳곳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흐르는 물의 양이나 폭으로 봐서는 강보다는 천에 가까운 것이
관광을 위해 새로 예쁜 이름을 만들어 붙여주었나 보다 했으나... 아니었다.
" 남대천이란 하천명은 현재 타지역 여러 곳에서 하천명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1911년 일제강점기시설 조선총독부에서 조사ㆍ작성한 필사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김화군편의 군내면 천명(川名)에 표기돼 사용되면서 일제의 의도적인 명칭 왜곡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 화강복원추진위, 2009년 7월 2일 환경일보 재인용
이에 주민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을 샅샅이 뒤져 '화강'이라는 옛 이름을 찾아냈다고 한다.
남대천(남쪽의 큰 하천)이 일제식 이름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화강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옛 기록에서 찾아낸 것일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나의 섣부른 예감과 달리 명분도 있고, 근본도 있는 개명이라서 좋았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지우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을 알고 나자
철지난 유원지만 같던 쉬리공원과 그저 그런 실개천 같던 화강이
내 자란 곳인 것 마냥 애틋해졌다.
걷기의 마법
서너 시간 내내 화강을 따라 걸었다.
청정지역의 맑은 물과 인적 없는 평평한 길,
숨어 있는 작고 평화로운 마을들.
지금까지의 평화누리길 중 가장 고요한 길을 한발 한발 걷는 동안
지고 왔던 무거운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물의 마법인가, 걷기의 마법인가
그렇게 걸으며 알게 된 사실 하나.
화강이 강보다 천에 가깝게 보인 이유가 있었다.
홍수피해가 심해서였는지 화강 거의 전 구간에 걸쳐 관계공사를 해 놓았고,
다음 날 상류로 올라가니 몇 년 전 완공된 잠곡저수지라는 커다란 댐이 있었다.
관계공사와 저수지가 없었던 시절,
화강은 그 이름대로 맑고 크고 도도하게 흘렀으리라.
이름을 다시 불러올 수는 있지만 변해버린 풍경은 되돌려지지 않는 법.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한 화강이 그 이름에 걸맞는 풍경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군인들의 마을
해가 저물어 갈 즈음 자등리 마을에 들어섰다.
노을이 아름다워 자등리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옛 풍경인 듯,
그보다 강렬한 인상은 마치 백골부대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동네 분위기였다.
사방이 군시설이고, 오가는 사람도 퇴근한 군인들 아니면 군가족으로
오랜만에 병영의 향기를 진하게 느꼈다.
이 동네 어느 구석에서 텐트를 치고 자야할 텐데
병영마을이니 일단 치안은 좋을 듯 했다.
갔다와서 알게 된 바로 백골부대가 소속된 3사단은 전술변경에 따라 포천으로 이전할 계획에 있으나
현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추진이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2021년 초가 최근 기사이니 지금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현지 주민들이 외박 나온 군인들에게 바가지를 많이 씌웠나 보다.
특히 와수베이거스라 불리는 와수리 읍내 유흥가는 폭리가 더욱 심하다고.
있을 때나 잘 하지...식의 현지인에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다.
동네를 한바퀴 둘러본 바로 군부대가 빠져 나가면 동네가 없어질 형편이라
뭔가 대책이 필요해 보이긴 했다.
흉물이 될지도 모를 테마파크보단 제대로 된 남북교류를 위한 공공시설로 거듭나길 바랄 뿐.
산책로의 밤
해가 지기 시작한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잘 곳을 찾았다.
화강을 따라 조성된 백골마루쉼터 산책로 끄트머리에 있는 데크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에서 살짝 비껴나 있고, 가로등과 벤치도 있어 나쁘지 않았다.
남은 김밥으로 허기를 때우고, 군인아파트들이 건너다보이는 데크 위에 텐트를 쳤다.
자리를 잡은 직후 산책로 캠핑의 단점을 알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산책을 나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몸도 마음도 편히 쉬어지지가 않았다.
밥을 먹고, 옷을 갈아 입는 등등 쉬는 동안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
역시 제일 무섭고 불편한 것은 어둠이나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 시선들을 피해 일찌감치 텐트로 들어가 몸을 눕혔다.
망가진 평화, 끊어진 길, 지울 수 없는 흔적, 잘못 잡은 잠자리...
걸어도 걸어도 헝크러진 길과 마음 정리되지 않는 하루였다.
이런 날도 있는 게지, 어쨌든 3코스를 끝냈으니 다행이야...
내일이야말로 역대급 고난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음은 꿈에도 모른 채
그렇게 지난 오늘만을 탓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