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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 Jan 11. 2018

내가 웃지 않는 이유

나는 너를 위해 웃지 않는다


나는 굉장히 잘 웃는 사람이었다. 웃음이 한번 터지면 멈추질 못해 난감한 적도 많았다. 강의실이나 공공장소에서도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면 혼자 실실 웃곤 했다.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웃어대는지' 신기해할 정도였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나자 내 얼굴에선 웃음기가 싹 가셨다. 종종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했다. 말을 섞지 않으면 무서워 보인다는 말도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그런 태도가 나를 보호해준다는  터득했기 때문이다. 




젊은 여자가 웃으면


사회인이 되면서 가장 크게 실감한 건 '계급의 추락'이다. 나는 '젊은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누가 대놓고 알려준 건 아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사건들은 나의 온몸에 얼음물을 끼얹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넌 하찮은 젊은 여자일 뿐이라고.


예의 상, 호감을 주기 위해, 또는 상대가 한 농담이 재밌어서 웃으면, 십중팔구는 그때부터 선을 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사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슬쩍 말을 놓거나, 갑자기 절친처럼 군다. 호구조사를 하면서 얼마를 벌어 얼마를 저축하는지까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개중엔 '젊은 여자가 나를 보고 웃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날 좋아하나? 나한테 관심 있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나는 웃음을 통제했다. 적절한 안전거리를 확보하려고 어렵게 굴었다. 그래도 컨트롤이 되지 않으면 "일적인 얘기만 하시죠", "무례하군요", "원래 그렇게 아무거나 막 물어보세요?"와 같은 멘트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비단 일터에서 뿐만이 아니다. 운동화를 사러 간 스포츠 매장에서,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택시 안에서, 난 너무도 쉽게 '애송이' 취급을 받았다. 모두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과시하려고 혈안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한 살이든 두 살이든,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어떻게든 우월함을 입증하려 애썼다. 심지어 업계 경력이 나보다 짧거나 나이가 적은데 다짜고짜 반말부터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녀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무례하다. 그렇지 않은가? 




애교에 대한 요구


나는 업무적으로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을 때,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기 위해, 또는 기분이 좋을 때 웃는다. 그러니까 '내가 웃고 싶을 때' 웃는다. 한 번은 고된 하루가 끝나고 남자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중이었다. 운전을 하던 남자친구는 내비게이션에서 '좌회전입니다'라는 음성 안내가 나오자 내게 말했다. 

"귀여운 버전으로 해봐."


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뭔 소리야 갑자기..."


남자친구는 다시 졸랐다. 귀요미 버전으로 '좌회전입니다'를 해달란다. 약간 불쾌해졌다. 한숨을 쉬며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친구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서운해했다.

"그게 뭐라고 그것도 못해줘? 여자친구한테 애교를 구걸해야 돼?"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왜 애교를 강요해? 뭐하자는 거야, 내가 원숭이야?"




기분과 정서에 대한 컴플레인


친구의 이야기다. 빡빡한 스케줄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였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날 하루가 너무 힘들어 계속 지친 내색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가 무심코 내뱉은 말.

"도대체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야? 어려워 죽겠네."


친구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어떻게 연인 사이에 그런 대사가 튀어나올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위의 경우는 모두 이걸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여자는 항상 상냥해야 하고 상대의 기분을 살펴야 한다. 즉, 정서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내게 애교를 요구했던 옛날의 남자친구는 내 친구들과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식사가 끝나고 어땠느냐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OO씨는 생글생글 잘 웃어서 참 좋더라. OO는 글쎄... 너무 안 웃어서...좀..."


내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 남자친구 진짜 괜찮다! 대체 뭐가 마음에 걸린다는 거야?"




특이한 요구


물론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걸 분별해내고, 성별이나 직업의 프레임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떤 분은 내게 "주변에 열린 사람들이 많아서 사회생활이 힘들겠다"고 우려했다. 지나치게 건강한 관계와 사람들 때문에 눈이 높아졌을 거란 우스갯소리다.


한 남자친구는 나와 말다툼을 하다가 "후진국에서 왜 선진국 사람을 바라느냐"고 항변했고, 다른 남자친구는 내게 "한국 여자가 아니라 프랑스 여자 같다"고 했다. 내 기분과 의견을 너의 그것만큼 존중해달라는 것이, 그렇게도 들어주기 어렵고 힘든 부탁이란 말인가? 왜 나를 특이한 여자로 만드나? 내 눈엔 이 모든 것들이 굉장히 특이하게 보이는데 말이다. 









엄지 umji.let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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