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구례 여행기
한국에서 어느 지역을 가장 좋아한다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가장 먼저 떠올릴 지역은 제주의 동쪽 마을이다. 색색의 낮은 지붕과 돌담, 새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시골마을과 바다, 그러나 걷다 보면 힙한 카페와 빈티지샵, 바가 종종 등장하는 제주의 동쪽을 좋아한다. 자연이 있고, 적당한 고요함과 한적함이 있는 시골 마을이지만 요즘 감성의 힙한 장소는 몇 군데 있는 곳.
하지만 제주는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는 진입장벽이 꽤 높아서, 1년에 많아도 2~3번 갈 수 있을 뿐이다. 섬 말고, 육지에 이렇게 제주 동쪽 마을 같은 바이브를 가진 지역이 어디 없을까 계속해서 찾아봤지만 마음에 쏙 드는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들어온 구례! 왜인지 이유 없이 끌려 전부터 계속 가고 싶었는데, 찾아볼수록 내 취향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친구들과 초여름의 구례로 떠났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구례에 가는 방법에는 버스, 기차 두 가지가 있다. ktx로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ktx는 정말 빠르게 매진이 된다. 처음에 ktx를 예매하려던 시점은 봄이어서, 산수유 축제 때문에 매진인가 싶었는데 산수유 시즌이 지나도 몇 달째 쉽게 매진되는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보다.
나는 기차여행의 낭만적인 느낌을 좋아해서 고민도 없이 기차를 선택했다. 용산역 출발 itx마음을 타고 4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너무 오래 걸리나 싶었지만, 오랜만의 기차 느낌을 즐기고, 한숨 자고 책도 읽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오히려 버스를 타고 온 친구들도 조금 막혀서 3시간 30분 넘게 걸렸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기차를 추천한다!
구례에서 유명한 다슬기로 요리한 수제비를 먹고, 근처 분위기 좋은 카페 <오차 커피 공방>에 왔다. 천천히 내려주시는 드립커피, 겹겹이 쌓여 있는 이곳저곳에서 모으셨을 커피잔들, 바우와우를 닮은 강아지, 불교박람회에서 볼 수 있을 듯한 불교&부처님 컬렉션이 인상 깊었던 카페였다. 어디선가 스님이 나타나셔서 커피가 맛있냐고 물어주시고, 직접 키운 자두를 갓 따서 나눠주시는 곳. 오후 햇살을 맞으며 창가에 앉아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시간이 좋았다. 창밖으로는 잘 키운 식물 화분들이 많이 보였다. 식물 잘 키우는 식당/카페는 맛집이라는 가설이 또 한 번 검증되는 시간.
구례에는 빽빽한 도시의 여러 면모에 질려 한적한 시골마을로 내려와 가게를 연 사장님이 많은 듯했다. <나기의 방> 그리고 <풋콩>을 운영하시는 사장님도 그중 하나. 친구의 지인의 지인이 하시는 곳이라고 해서 방문해 봤는데 <나기의 방>은 진부하지 않은 귀여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 좋았고, <풋콩>은 일본의 풋콩 안주를 좋아하는 나에겐 이름부터 이미 취향 저격이었다. 전남친 레시피로 만든 풋콩안주의 이름을 '스바세키'라고 지은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사장님이 계신 공간 <풋콩>은 구례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곳이다. 혼자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1인석과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볼 수 있는 dvd 플레이어, 벽에 붙은 영화 <너와 나> 티켓과 <비밀의 언덕> 포스터까지, 좋음을 넘어서 나도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까지 강하게 들었던 곳. 이곳에서 나눈 오랜 친구들과의 편안한 대화, 흘러나오던 음악, 그리고 구례로 오게 된 사장님의 스토리와 추천해 주신 구례 핫플까지!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가득하다. 사장님 말씀으론 구례에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더라. 나도 분명 이곳을 여러 번 찾게 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의 숙소는 마산면에 위치한, 귀여운 강아지들이 있는 한옥 스테이였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을 산책하는데, 제주도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돌담에 쌓인 돌이 제주도보다 둥글둥글하고, 모내기 밭이 많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거대한 지리산이 보인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자연 속에 폭 파묻힌 평화로운 곳이라는 점만은 같다.
왠지 구례 맛집을 검색하면 빵집이 많이 나오는 게 수상해서, 친구가 구례의 빵에 대해 검색했다. 구례는 우리 밀 산업이 활발한 지역이라고 한다. 목월빵집은 그중에서도, 구례에서 나는 재료만을 가지고 건강한 빵을 만드는 곳이라 인기가 많다. 목월빵집을 방문하기 전에는 비슷비슷한 지역 빵집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공간과 브랜딩, 시스템의 삼박자가 꽤나 잘 맞춰지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르쉐 시장에도 종종 등장하시는 빵집이었다. 초여름의 산들바람이 좋아 야외 정원에서 빵과 커피를 먹는 시간이 화창하고 좋았다. 입구에서는 귀엽게 빵을 외치는 빵! 빵! 빵!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고, 참새들이 사람의 곁에 총총 달려와 빵 부스러기를 먹는 평화로운 빵집이었다.
구례에 오고 싶었던 다양한 이유 중 하나였던 화엄사. 화엄사는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절로, 꽤 규모가 크다. 한글로 쓰인 현판과 색이 없는 담백한 나무 느낌의 절 등 기존의 절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나는 부분들이 많아서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 좋았다. 거대한 지리산이 바로 옆에 보인다는 것도 절의 분위기에 장엄함을 더한다.
화엄사의 가장 꼭대기에는 구층암이 위치해 있는데, 이곳까지 조금만 올라가면 스님이 내려주시는 따뜻한 녹차를 마실 수 있다. 야외 좌석에서 보이는 산 뷰가 왠지 발리를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화엄사 자체도 고즈넉하고 조용하지만, 구층암까지 올라오면 절의 고요한 분위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꼭 올라가 보면 좋겠다.
화엄사에서 내려오는 길은 지리산 등산객들과 루트가 겹쳐서 그런 것인지 맛집이 줄지어 서있다. 서울의 진주회관 콩국수보다 맛있다고 추천받은 <구례 밀밭>의 콩국수! 위에 살얼음이 올라가 있는 독특한 비주얼에 놀랐고, 찐한 맛에 두 번 놀랐다. 인생 최고의 콩국수!
식당 근처에는 <올모스트 데어>라는 하이킹, 캠핑 등 아웃도어 용품을 파는 힙한 편집샵이 있다. 아웃도어 감성 좋아하는데 심지어 인도, 불교 그리고 환경에 대한 감성이 한 스푼이 더해져 더 취향이었다. 구례에는 무슨 일인지 짜이를 파는 집이 많다. <올모스트 데어>에서도, 책방 <로파이>에서도, 심지어 구례 오일장에도 짜이를 파는 분이 계시다고 한다. 인도와 뭔가 통하는 감성이라도 있는 걸까. 어쨌든, 주문을 하자 즉석으로 밀크팬에 끓여주신 짜이 덕분에 산에 온 기분 제대로 누렸다.
짜이와 더불어, 구례의 가게들에는 다양성에 대한 가치, 환경 보호를 외치는 포스터들도 많이 붙어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흡사 마포구 어느 작은 가게의 바이브가 느껴지게 만든다.
우리의 마지막 행선지는 능소화가 가득 핀 카페 <무우루>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자 여름의 상징인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서 황홀했다. 다양한 꽃으로 가득 찬 정원에 들어서자 백발의 사장님이 반겨주신다. 음료를 주문하고 구례를 모티브로 만든 향수를 시향 했다. 사장님의 자녀분들도 서울에서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구례로 내려와 함께 일을 하신다고. 자녀분들의 손길이 닿은 것 같은 다양한 메뉴들과 플레이팅이 조화로웠다. 서울에서 일하느라 애쓴다고, 구례에서 좋은 시간 보냈는지 여쭤봐주시고, 떠나기 전엔 예쁜 여름 보내요!라는 낭만적인 말까지 남겨주신 사장님 덕에 산뜻한 마무리가 되었던 공간이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려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께서 다음에 또 구례에 오라며 명함과 함께 사탕 세 개를 손에 쥐어주셨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따뜻하다니! 겨우내 추웠던 마음에 닿아 온 초여름의 햇살처럼 반갑고,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여행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는 얘기를 자주 했던, 능소화와 짜이가 있는 시골마을 구례. 1박 2일의 여정이라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아서 올해 중에 한 번 더 올 예정이다! 제주의 동쪽 마을 같기도, 망원동 같기도, 그러다가도 장엄한 대자연과 고요한 절이 나타나는 그런 동네. 사람에 치이지 않고, 천천히 거닐 수 있을 만큼 한적하면서도, 좋은 사장님과 따뜻한 이야기가 있는 가게들은 많은 그런 동네여서 매력 있었다. 최애까진 아직 아니더라도(바다가 없다는 점이 아쉬움), 차애의 자리까지는 올라왔을지도..? 앞으로 구례의 사계절을 다 누려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