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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다혜 Aug 28. 2024

비의 비일상성

비가 오면 더 좋아지는 곳 

비가 내리는 날엔 압력이 낮아진다. 저기압의 영향으로, 평소 우리를 강하게 누르던 압력이 약해져 통증을 더 잘 느끼게 된다고 한다. 비 오는 날 무릎이 쑤시거나 두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나도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그 압력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늘 비 오는 날이 되면 기분이 좋지 않거나 축 처지게 되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나는 자연스레 비 오는 날을 싫어하게 됐다. 지금도 마음은 변함이 없으나, 인생엔 종종 비가 오는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날들이 종종 생겨난다. 비가 오히려 그날을 기억하는 특별함이 되어버리는, 비가 오면 좋은 시간들 말이다.


마라톤 그리고 잔디 위에서 펼쳐지는 음악 페스티벌. 이 둘의 공통점은 야외에서 열리는 이벤트라는 것, 제발 이 날만큼은 제발 비가 오지 않길 일기예보를 체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비 오는 날의 마라톤, 비 오는 날의 페스티벌을 모두 경험한 내가 지금 와서 이 날들을 뒤돌아보면, 오히려 비가 왔기에 이 이벤트들이 더 특별하게 기억된다. 비에 대한 짜증이 해탈로 바뀌고, 비를 피하지 않고 즐기기 시작하면 그 이벤트가 더 좋아지는 모순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비가 주는 비일상성, 같은 일상도 비가 끼어들게 되면 똑같은 일상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면 가뿐하게 달려 나갔을 마라톤에서, 우비를 입네 마네 고민하는 것, 물 웅덩이를 첨벙이며 달리는 것, 눈에 들어가는 비를 닦아가며 옆 사람과 함께 웃음 짓는 것, 흠뻑 젖은 머리를 하고 메달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은 마라톤 대회에 대한 경험 중에서도 꽤나 특별한 마라톤 대회의 경험처럼 여겨진다.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우아하게 와인을 따라 음악에 발을 까닥이는 것이 페스티벌에 기대하는 보통의 풍경이지만 비가 끼어들면 그 경험은 완전히 달라진다. 앉아있는 돗자리에 점점 비가 고이며 내 자리가 물웅덩이로 바뀌는 것, 빗속에서 음악에 맞춰 점프하느라 운동화가 모두 진흙범벅이 되는 것, 빗물이 섞인 맥주를 마시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낄낄대는 것 모두 비가 오는 날에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오히려 하늘의 선택을 받아야 할 수 있는 경험이기에, 원영적 사고로 본다면 오히려 럭키비키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는 날엔 압력이 낮아진다. 평소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이래야 한다'는 압박도 사라진다. 비를 쫄딱 맞고 돌아다니면 안 돼, 웅덩이 위에 앉으면 안 돼, 빗물을 첨벙이면서 걸으면 안 돼, 진흙이 묻으면 안 돼. 이 모든 압력을 낮추며 일상을 비일상으로 바꾸는 것은 비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고 즐기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작은 손바닥으로 애를 쓰며 정수리를 가려봤자, 자연이 내리는 비를 온전히 막아낼 수 없다. 나에게 오는 불운을 두 팔 벌려 껴안으며, 진흙이 묻든 쫄딱 젖든 상관하지 않고 한 번 맞아보자 결심하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발버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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