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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Feb 23. 2020

'비싼 미용실' Flex 해버렸지 뭐야

가끔 해볼 만한 '돈지랄'

최근 이직을 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후,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이직에 성공한 나 자신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핑계로 몇 가지 '돈지랄' 리스트를 만들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의) '비싼 미용실'에 가보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해당 미용실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수많은 헤어 사진들을 거의 외우기 직전까지 보고 또 본 결과, 고심 끝에 한 디자이너를 골랐다. 견적 문의 댓글을 남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DM이 왔고 그 주 주말로 예약을 잡았다.


다음날 출근해 미용실 예약 소식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친구, 아는 지인들의 후기가 쏟아졌다. 압구정 지점은 머리를 해주는 내내 오늘 뭘 타고 왔는지, 하는 일은 무엇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등 온갖 신상정보를 캔다더라, 꾸질 꾸질 하게 하고 가면 무시당하니까 옷도 차려입고 화장도 빡세게 하고 가야 한다더라, 결과물은 만족스러우나 지속 기간이 짧다더라 등등. 온갖 소문들을 듣고 나니 기대와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 나는 직장 동료의 조언대로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재계 후 아끼는 옷을 입고 평소보다 열심히 화장을 한 후 집을 나섰다. 나의 첫 번째 '비싼 미용실' 체험기. 그 소감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나만 몰랐던 세계

추운 토요일 오후. 유명한 미용실이기에 손님이 많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미용실은 마치 '공장'처럼 보였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수십 명의 스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는 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며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촌스럽게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대기실에서 함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머리에 이런저런 기구를 꽂은 채 잡지를 보고 있는 사람도, 디자이너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커트를 받고 있는 사람도 모두 이 공간에 익숙한 듯 보였다. 나에게는 큰 맘을 먹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찾아온 공간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는 일상일 수 있겠구나. 여기 오는 게 뭐라고 그렇게 혼자 마음을 졸였던 걸까, 상당히 머쓱해졌다.

 

잠시 후 인스타로 예약을 했던 디자이너를 만나 인사를 나눈 후 미리 문의했던 사진을 보여줬다. 이름하여 '웬디컷'으로 불리며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스타일이라 금세 상담이 끝났다. 본격적으로 머리를 하기 전 어시스턴트가 두피 검사를 해주고 이에 맞는 약품으로 샴푸를 해줬다. 이후 펌에 앞서 간단한 커트가 진행됐다. 그런데 빗질 몇 번, 가위질 몇 번 슥슥하는 것 같더니 대충 내가 원하던 스타일 각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거울 속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로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선택한 헤어 컷의 견적은 24만 원. 내가 29년을 살며 미용실에 지불한 가격 중 단연 역대급이었다. 커트와 펌, 클리닉이 모두 포함된 가격이라 해도 나 같은 월급쟁이 나부랭이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하지만 비싼 만큼 돈값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역할 분담 시스템이 기가 막혔다. 디자이너의 커트가 끝나자 담당 어시스턴트의 안내에 따라 모든 과정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어시스턴트는 그 과정 사이에 조금이라도 마가 뜨면 큰일이 나는 사람처럼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는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수시로 직원들과 상황을 주고받았고 나를 맡은 디자이너로부터 끊임없이 이런저런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 마무리 샴푸와 마사지를 담당하는 어시스턴트 또한 따로 있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빨리 머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남들 쉬는 주말에 의자에 엉덩이 한번 못 붙이고 계속 샵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샴푸를 하고 머리를 말려주는 직원들을 보면서 '다들 먹고 살기 참 힘들다'는 생각에 애잔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5일 내내 지랄 맞은 광고주들에게 시달린 후 '돈지랄'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돈 낸 만큼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서비스 또한 훌륭했다. 샵 내 모든 도구들은 내가 그동안 다녔던 동네 단골 미용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소한 것들 천지였다. 동네 단골 미용실 언니(라고 부르지만 실은 아주머니)의 거침없는 손길과 달리 샴푸나 펌 약에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손길들도 인상 깊었다. 펌을 하는 동안 먹으라고 갖다 준 간식이 너무 맛있어서 혹시 하나 더 먹을 수 있냐고 하니 바로 '브런치 세트'가 등장한 점도 플러스 요인!



이런 '돈지랄', 가끔은 할만하다

가 내 결론이다. 물론 아무리 24만 원을 냈다한들 미용실에 다녀온 이후 내가 전문가의 손길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디자이너가 말해준 '툭툭 털어서 말리면 이 스타일 그대로 나오세요'를 열심히 실천해봤지만 거울 앞에는 웬디가 아닌 웬 삽살개 한 마리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미용실에 간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그날의 머리를 똑같이 재현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누가 봐도 '파마했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나의 동네 단골 미용실과는 달리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는' 세련된 자연스러움이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며칠이 지나 손질에 익숙해지자 드라이를 대충 한 후 손으로 가볍게 모양만 잡으면 다른 스타일로 연출할 수도 있었다. 적은 돈을 내고 몇 달 동안 못생긴 내 모습을 견디느니 돈을 더 주더라도 예뻐진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좋았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엄두도 못 냈던 비싼 브랜드 미용실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묘한 만족감을 느끼게 했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참 인색한 사람이었다. 남들에게는 잘만 하는 비싸고 좋은 선물도 나 자신에게는 어쩐지 가당치 않은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기껏해야 강남역 지하상가가 아닌 쇼핑몰에서 4~5만 원짜리 원피스를 사는 게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하지만 미용실에 다녀온 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유명한 브랜드 미용실에 가는 것도, 그곳에서 하루에 결제한 24만 원이라는 돈도, 실은 내 만족감을 위해서는 별 것 아닌 것들이었다. '내가 나를 위해 이제 이 정도를 기꺼이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 사실이 24만 원 이상의 만족감을 내게 줬다.


머리가 자라면 그 '비싼 미용실'에 다시 찾아가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볼 생각이다. 그때쯤이면 나 자신을 대접하는 데에 조금은 더 익숙해져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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