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23
정말 고기 얘기를 많이 쓰게 되는구나. 고기가 중요한 음식이긴 한가 보다. 요즘 대량 생산으로 지나치게 하찮게 취급되는 게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만큼. 그런데 이번에 쓰려는 음식은 그냥 고기는 아니고 고기의 부산물이며, 아무래도 더욱 하찮은 취급을 받는 식재료다.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가 그만큼 각성 계기가 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예전에 감명 깊게 읽은 [먹는 인간](헨리 요)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 하층민들의 음식을 다뤘고 재일 교포의 상징으로 천대 받던 ‘곱창 요리’를 다룬 연극과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야끼니꾸 드래곤)] 같은 작품은 한때 꽤 화제가 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꽤 음식 문화가 평등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평범한 젊은이들도 한번쯤 파인 다이닝을 찾아 인생 사진을 남기고, 특히 요즘은 상류층이나 하류층이나 다들 같은 앱으로 같은 프랜차이즈에서 비대면 배달을 시켜 먹는 처지가 되었으니까. 계급 격차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음식은 아마 ‘술’뿐 아닐까 싶다. 와인이고 위스키고 간에 결국은 몸에 안 좋은 물질인 술이 하필이면 계급 격차가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식품 종류가 돼 버린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물론 음식에도 여전히, 분명 계급 차이는 존재한다. 대중 매체에 나오는 상류층의 파티 모습에서만 위화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중산층으로 자랐고 그 계급에서 거의 벗어나보지 못한 나도 한번은 중산층과 하류층 사이 음식 격차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있다. 대학 때 ‘빈활’이라는 걸 갔을 때였다.
그때는 대학생들이 농활, 즉 농촌 봉사 활동을 방학마다 흔히 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빈활, 즉 빈민 활동이라는 것까지 가는 학생은 드물었다. 빈활이란 도시 내 철거민촌으로 봉사 내지는 지원 활동을 나가는 거였는데, 운동권 학생들 중에서도 꽤 강성인 학생들만 참여하는, 꽤 위험도가 있는 활동이었다. 625전쟁 이후 생기기 시작한 판자촌에 이어 탈농촌 행렬이 본격화되면서 도시에 빈민가가 급속히 늘어나던 60-70년대를 거쳐, 도시 정비와 부동산 개발 사업이 시작된 80년대 이후, 이리저리 힘없이 쫓겨나던 빈민들과, 어떻게든 저항하며 쫓겨나지 않으려 애쓰던 빈민들이 90년대에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런 빈민촌, 혹은 판자촌은 당시에도 꽤 흔했던 국가 폭력이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장이기도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에도 언론 통제 혹은 무관심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잘 몰랐던 사실이다. 그래서 대학생 운동권 조직의 주요 활동 거점 중 하나가 되기도 했고말이다. 참고로, 다른 주요 활동 거점, 가장 중요한 운동권 활동 거점은 공장이었다.그래서 학생때는 농촌봉사활동을다니다가 사회 운동에 투신할 결심이 선 젊은이들은 공장으로 ‘위장 취업’을 했다.
그런데 빈활은 그다지 활성화된 운동권 활동이 아니었다. 백골단으로 대표되던 한 번의 폭압으로 판자집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거주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조직은 완전히 와해되고 마니까, 지속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활이라는 활동도 드문 편이었는데, 그다지 열혈 운동권도 아니던 나는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현저동이라는 곳으로 빈활을 가게 됐다. 지금은 독립문 뒤편에 세워진 낡은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 안산 자락에 광활하게 형성된 판자촌이 철거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가서 뭘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냥 선배를 졸졸 따라가서 벌벌 떨다 왔던 것 같다.
낯설고 참담한 풍경, 허술하고 흙먼지가 풀썩이는, 비닐 천막이 퍼덕이는 집, 집 바깥과 집 안이 잘 구분되지 않던 공간들, 거기에서 대학생들을 맞이하는, 피로하게 날선 사람들의 표정.
그런데 그들이 대접을 한다며 내놨던 음식 하나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녹색 플라스틱 그릇에 물컹하고 반투명한 투툼한 조각들이 고추 양념에 버무려져 있었다. 조금 먹어보니 묵인가 싶었는데, 묵보다는 훨씬 물렁하고 맛도 고소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거주자들은 좀 비딱하게 웃으면서 돼지 비계 버무린 거라고 답했다. ‘이런 거 처음 먹어보지?’ 하는 눈빛이었다.
돼지 고기야 흔히 먹는 거고, 거기엔 늘 비계가 붙어 있는데, 수고스레 비계만 따로 잘라내어 모아서 요리를 만들었다는 말일까? 그렇다기엔 형태로 보나, 허술한 보관 방식으로 보나, 그냥 대충 만든 음식이었다.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 물컹한 식감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돼지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큰 비계 덩어리는 따로 떼어내 요리의 보조 재료나 기타 산업용으로 싸게 팔 테고, 빈민들에겐 그런 싼 식재료를 가져다가 잘게 썰어서 원래의 무미와 이질적 식감을 감추는 양념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글 ‘선배가 대접한 압구정 빅맥’의 언니가 새로 이사 가서 우리에게 파티를 베풀던 그 아파트가 바로 현저동에 세워진 거였다.
ps1 빈활에 대해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결과들과 함께 아래 글을 발견했다. 결론에 동의하긴 힘들지만 중간 통찰은 의미가 있는 듯해서 링크를 남겨둔다.
https://haja.net/review/4555
ps2 돼지비계 역시 흥미로운 검색 결과가 많은데, 감동적인 블로그 일단 소개.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ameroon86&logNo=220531407488&referrerCode=0&searchKeyword=%EB%B9%84%EA%B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