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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쨌든 Oct 30. 2024

맥주캔 한턱과 공룡 선물

술과 파티의 시절 11

중3 때 우리집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새로 조성된 대단지 아파트라서 동 간격이 꽤 널찍한 곳의 5층이었다. 그래도 건너편 동과 마주보는 배치니까, 서로서로 창문이 다 들여다보였지만, 내 방 창문 아래쪽은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였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가로수 묘목들의 우듬지가 보글거렸다. 


거의 처음 가지게 된 나만의 방이었다. 이전에도 동생과 같이 쓰던 방을 떠나, 작은 내 한 몸 누우면 꽉 차는 골방으로 숨어들곤 했지만, 부엌 짐들도 빼곡해서 나만의 방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파트 5층의 그 집에선, 처음 생긴 나만의 방에다가 방문도 잠글 수 있어서 난 꽤 자유(?)를 만끽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더 본격적으로 자유를 획책했다. 방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이다. 술이야 크게 문제될 일은 없었는데, 담배는 문제긴 했다. 난 대담하게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건너편 동의 불 켜진 창문들을 빤히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댔다. 볼 테면 보라지, 나 같은 사람이 저쪽 동에서도 나오는 거 아닐까? 의외로 한 번도 나처럼 창문을 열고 담배 피는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었다. 


추운 겨울에도 창을 열고 담배를 피노라면, 갑자기 돌풍이 불어서 잠가둔 방문이 덜컹거릴 때가 있었다. 그러면 잠시 후 엄마가 방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창문 연 거야? 난방비 비싸, 얼른 닫아!” 그런 때만 잠시 흠칫했을 뿐, 대체로 난 방 안에서 안전하게 나 혼자만의 파티를 즐겼다. 


비교적 데면데면 지내던 선배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바로 옆 단지로 이사 왔다며, 동네 주민끼리 만나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 그때 단지 사이 상가 건물에 편의점이 새로 들어왔다.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당시로서는 꽤 드문 가게였다. 그 앞에 테라스도 꾸며놓고 좌석을 늘어놓아서, 언제 한 번 가봐야지 벼르던 곳이었다. 


나는 새로 산 가죽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미리 테라스 좌석에 앉아 있던 선배가 손을 흔들다가 나를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오토바이 타러 가냐?” 나는 추울 거 같아서 입었다고 웅얼거렸다. 


어쨌든 우리는 신기해하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맥주와 오징어를 사가지고 나왔다. 아파트 단지 한복판의 테라스였지만 선배와 함께인 나는 더욱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셨다. 바람이 상쾌했고 우리는 기분 좋게 킬킬거렸다. 


한 캔을 다 비운 후 두 번째 캔을 사러 들어갔을 때, 선배가 장난감 코너를 빤히 보더니 공룡 모양 피규어를 샀다. 나는 다소 부루퉁하게 물었다. “그건 왜 샀어요?” 선배는 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공룡 주려고. 웃기잖아.” 귀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공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여자애가 있었다. 


우리는 시시한 이야기를 좀 더 주고받다가 두 번째 캔을 비운 후 깔끔하게 돌아갔다. 다음날인가, 먼발치서 그와 그녀가 머리를 맞대고 웃으며 걷는 모습을 보았다. 공룡 피규어를 건네주었을까? 그녀에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데… 술은 나를 사주고 피규어는 쟤를 주네? 누가 더 이득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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