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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쓴이 Nov 15. 2022

우린 이미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감정표현의 자유

코로나 팬데믹 이후 마스크의 좋은 점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많다.

단순히 화장을 안 해도 된다거나, 감기가 잘 안 걸린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심층적인 편의를 떠올리자면 언제 어디서든 감정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이다.


평소에 유독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굳이 따지자면 그런 편에 속한다. 굳이 표정 관리가 필요 없는 순간도 있지만, 살다 보면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없는 상황들도 참 많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감정 표현이 참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상황에 따르는 보편적인 감정 표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우리는 그들을 너무도 쉽게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린다. 감정은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주인은 그저 나 자신일 뿐이다.

감정조차 강요당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어떤 자유가 허락될 수 있을까.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뫼르소를 보며 3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덕분에 장례식이 끝나고 사석에서 만나는 지인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만 했다.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게 싫었고, 그 당시에는 엄마의 부재가 실감 나지 않았다고.

이 말이 사실이 아닌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는 자체가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내 변명(?)에 분명 티는 못 내지만 속으로는 그들만의 사족이 달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엄마의 죽음에 눈물을 참을 수가 있지? 그게 참아지는 건가? 하고 말이다.


감정이란 것이 상황에 따라 세팅되어있어 버튼만 누르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어느새 눈치를 보며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니, 감정을 강요받고 있다.

지금 슬퍼야 슬픈 것이고, 지금 기뻐야 기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인생이 간단치가 않다.

결국 피곤을 무릅쓰고 감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정도로만 표현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굳이 마스크로 숨기려 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벽들을 쌓고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사실 살다 보면 생각만큼, 기대만큼 감정이 요동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렇기에 크고 작은 불행들을 버틸 수 있고, 오로지 365일 기쁨에 취해서만 살지도 않는 것이다.

감정에 정답을 강요하는 사회일수록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개인의 감정들을 나의 감정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준다면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솔직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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