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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오 Sep 08. 2021

이해의 말

그때는 없었던

영미는 죽었다. 바로 어젯밤에.

천국으로 가는 대기실에서 반나절을 보낸 뒤 이제 낯설지만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된다.


"김영미 씨."

"네"


담당자의 커다란 덩치에 압도당할 뻔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는 부드러웠다. 인자하다는 게 더 적당했다.


"그렇게 사는 게 힘들었나요?"

"네 모든 것이 최악이었어요."


영미는 자신 있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왜냐면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스스로 이곳으로 오셨지만 김영미 씨의 삶은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저희들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영미는 순간 울컥할 뻔했다.

내 삶이 아름다웠다라...

늦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제 이곳에서 아주 평범한 삶을 사시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간절하게 원하던 것이 그거였어요. 평범하게 사는 것"


천국이라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영미는 만족스러웠다.

그 평범이란 게 뭔지, 그딴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 삶이었다.


"이 문을 나가시면 원래 살던 삶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겁니다."

"그럼 저희 가족들도 다 있나요?"

"아니요. 원래 알던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새로운 사람이지만 김영미 씨가 살던 환경 그대로입니다."


정말이었다.

혼자 살기에도 좁은 원룸은 그대로였고, 원래 다니던 회사도 다녀야 한단다.

심지어 빨래도 설거지도 청소도 전부 직접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천국이야!"


다만 주변 인물 중 영미가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직장동료도 영미는 전부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머릿속엔 자동으로 그들의 신상정보가 등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게 전부 그대로인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기요."

"네 김영미 씨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게 무슨 천국이에요. 이런 삶이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천국에서의 삶을 본 영미는 강하게 항의했다.

천국이라면 적어도 내가 살았던 삶과는 다른 삶 정도는 경험하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김영미 씨 그곳은 확실히 다른 곳입니다. 좀만 더 기다리시면..."

"사람들 얼굴만 바뀐다고 뭔가 달라지나요?"

"지금은 잘 모르시겠지만 아주 좋은 곳입니다."


영미가 담당자의 말을 끊고, 다시 항의했다.

담당자는 영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충분히 들어준 뒤 다시 차근히 설명했다.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지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 그렇다면 알겠어요."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닌데... 라면 투덜거렸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801호 사시죠?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901호인데 어제는 좀 시끄러웠죠.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이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아... 안녕하세요 뭐 괜찮습니다."


영미는 원래 다니던 회사로 출근을 했다. 사람들로 미어터질듯한 버스와 촉박한 출근시간 등.

짜증 나는 상황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씨 이게 무슨 천국이야. 계속 이대로면 지옥이나 다름없지."


영미는 투덜거리며 출근 전 항상 가던 카페에 습관적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지금 손님이 좀 많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급할 것도 없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늦은 것도 아닌데 커피와 함께 건넨 도장쿠폰엔 2개가 찍혀 있었다.


"영미 씨 어서 와요. 어제 야근하느라 너무 고생 많았지?"

"아... 야근이요? 뭐 항상 하던 건데요."

"항상 한다고 해서 쉬운 일이 아니지. 덕분에 어제는 잘 해결했어."


영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야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뭐.

미련하게 죽기 전날에도 야근을 했었지.


"자 점심들 맛있게 먹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와서 일하는 사람 혼날 줄 알아!"


부장의 너스레에 영미를 비롯한 직원들은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므라이스 먹고 싶은데 아줌마가 또 지랄하겠지?'


바쁜 점심시간에 백반이 아닌 메뉴를 시키면 항상 주인아줌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내 돈 주고 내가 먹겠다는데 왜 난리를 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천국이니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모 저 오므라이스 하나 주세요."

"아이고 오므라이스? 어쩌지 점심시간에는 너무 바빠서 다른 메뉴 시키면 좀 늦게 나오는데. 빨리 먹고 빨리 쉬는 게 좋지 않아요? 이쁜 언니 미안하지만 오늘만 백반 먹고 다음에 오면 내가 직접 오므라이스 기가 막히게 해 줄게요. 이해 좀 부탁할게요."

"아... 뭐 백반도 괜찮아요."

"아이고 고마워요. 얼굴만큼 마음씨도 이쁘네!"


영미는 결국 또 백반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천국이라 해도 별 수 없었다.


"자 우리 직원들 오늘도 수고 많았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우리 회사가 유지가 됩니다. 조심히들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영미는 역시나 터질듯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피곤하지 않았다.


"여기 801호인데 치킨 한 마리 배달해주세요."


밥을 하기 귀찮았던 영미는 치킨을 배달시켰다.

천국의 치킨이라고 뭐 별다를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이상했다.


"저 사장님 저 양념치킨에... 닭다리 하나가 없는데요."

"네? 정말요? 그럴 리가요?"

"정말이에요."


이런 일이 생기면 손해를 봐서 억울한 것보다 마치 진상고객 취급을 하는 사장님들의 태도가 싫었다. 

그냥 다시는 그럴 일 없도록 하겠다, 미안하다 등 말 한마디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꼭 크게 만들어야 성이 차나 싶다.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할 순 없지만 저희 가게에서 시켜 드신 건 맞으니깐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오늘만 이해해주시고 그냥 드시면 다음엔 공짜 치킨 한 마리 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원한 건 아니었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메시지 하나가 발송되었다.

무료 치킨 쿠폰과 사과의 말이 담긴.


"후유 천국에서도 별일이 다 있네."


이럴 거면 괜히 죽었나 싶었지만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미는 이전과 비슷한 삶을 그냥 계속 사는 수밖에 없었다.


몇 달 후


"김영미 씨 요즘은 천국이 좀 어떠세요. 뭐 힘든 일은 없으세요?"


담당자의 물음에 영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어나는 일들을 머릿속에서 쭈욱 나열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잠시라도 마주쳤던 사람들까지 전부 기억해냈다.





"음... 없습니다. 다 좋은 것 같네요."





담당자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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