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어느 정도 성공이라 할 만한 궤도에 오르고, 내가 디자인한 집들이 방송과 유튜브, 리빙 매거진 등에 공개된 이후 나와 더 코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있다. “금수저이신가요?” 반짝이는 눈으로 내가 입을 떼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또는 유튜브 채널 창에 댓글을 단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럼요, 태생이 금수저랍니다! 하고 냉큼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아직도 가끔 내가 금수저였다면 얼마나 평탄했을지에 대해 어리광 섞인 일장연설을 하곤 한다. 그러면 어리광을 묵묵히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인 남편이 피식 웃으며 농담 섞인 가벼운 핀잔을 던지곤 한다. 아직도 금수저 타령을 하고 그래.
금수저는 아니었어도 부족함 없이 자란 때가 있기는 했다. 파주로 귀촌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랬다. 어린이날 선물, 생일 선물,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가졌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부모님께 말하고 배웠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아빠 덕에 매년 가족 여행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생이 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것 같다. 학원을 갔다 집에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집 마당에 부모님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축 처져 망연자실한 얼굴로 양계장 방향을 바라보는 두 분을 보자 등줄기가 서늘하고 턱 근육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뭔가 잘못됐어. 직감적으로 눈을 돌려 바라본 양계장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 옷을 입은 아저씨들 대여섯 명과 커다란 포클레인이 있었다. 포클레인은 양계장 바로 앞 땅을 끝없이 파고 있었고, 아저씨들은 산 닭을 땅에 날라 묻고 있었다. 우리가 데려오는 병아리들은 보통 한 달 반쯤 쑥쑥 큰 뒤에 공장으로 옮겨 갔다. 기억하기로 저 닭들은 며칠 후 떠날 닭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닭을 산 채로 묻다니.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곧장 포클레인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흰 방역복을 입고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싸맨 아저씨들이 오지 말라는 듯 손을 다급하게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 닭을 왜 마음대로 묻어요? 아저씨들 누군데요!
사실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내 목소리가 포클레인 소리에 묻혀 허공으로 흩어졌다. 엄마가 나를 말렸다. 집으로 들어가. 화가 누그러지지 않아서 엄마에게도 소리쳤다.
엄마는 왜 가만히 있어? 지금 이러고 있을 때야? 우리 닭을 다 죽이잖아!
몇 주전부터 ‘국내에 AI가 빠르게 번지고 있다’는 뉴스가 매일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AI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우리 닭만큼은 아무렇지 않을 거라 자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매일 엄청난 비용을 들여 어마어마한 수준의 방역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도 바깥에 다녀올 때마다 아빠의 방역 지침을 따랐다. 그래서 옆동네 어느 농장, 뒷동네 누구네 농장이 조류 독감을 피하지 못했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 닭들은 멀쩡한걸.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아빠 옆에서 길길이 날뛰는 나를 보다 못한 엄마가 던진 말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우리 닭이 멀쩡한 건 상관없어.
무슨 소리야?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지역에 병이 퍼지면 팔 수가 없대. 다 묻어야만 한대.
눈물이 핑 도는가 싶더니 이내 눈앞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방문을 쾅 닫고 침대에 누워서 밤새 펑펑 울었다. 가계는 하루아침에 기울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티고 다시 일어서나 싶었는데 다음 해 여름엔 홍수가 왔다. 전봇대가 잠길 만큼의 대홍수였다. 언덕 아래 집들이 모두 잠겼고, 논밭이었던 땅은 별안간 강이 되어서 마을 사람들이 스티로폼을 뗏목처럼 타고 다녔다. 자고 일어나 보니 양계장의 닭들은 모조리 떠내려갔다. 여기서 끝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은 엎친 데 겹친다나. 그해 겨울, 폭설이 내렸다. 양계장 3개 동 중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양계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것은 우리 집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말과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옷가지만 겨우 챙겨 서울로 돌아왔다. 자가였던 조립식 단독 주택을 떠나온 새 보금자리는 은평구 신사동의 어느 낡은 다세대 주택 반지하 셋방이었다. 주인집엔 정문도, 작은 마당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 문을 쓰지 못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문은 골목길에 놓인 쪽문이었다. 프라이버시라고는 없는 집이었고 심지어 남동생과 방을 같이 써야 했다. 작은 집 전체가 아주 습하고 어두웠다. 늘 당연했던 마당과 도랑도, 맑은 하늘도, 짙은 안개의 냄새와 뻐꾸기 소리도, 시원한 바람도 더는 이웃이 아니었다.
전업 주부였던 엄마는 뭐라도 해야겠다며 일을 시작하셨다. 엄마가 매일 조금씩 벌어 오는 돈으로 버스비와 급식비를 겨우 낼 수 있었다. 용돈은 꿈도 못 꾸는 것이었고 교복이며 책, 필기도구들은 모두 중고로 구입했다.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는 날들이었지만 창피하거나 속상하진 않았다. 아니, 창피함을 느끼거나 표현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그저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일해서 이 생활과 이 공간을 탈피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탈피하고 싶었던 공간은 욕실, 아니 화장실이었다. 그 시절 살았던 집의 화장실은 들어가기조차 꺼려지는 곳이었다.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하부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아무렇게나 만든 화장실은 경사가 심한 낮은 천장이었는데, 심지어 단차가 있어서 변기는 계단 위에 있었다. 앉아서도 고개를 제대로 들 수조차 없을 만큼 낮았다. 비좁고 낮고 하수구 냄새와 곰팡내, 습도가 온몸에 금세 배는 최악의 공간. 화장실을 가기 싫어서 없던 변비가 생길 정도였다. 세면대는 당연히 없었고, 무릎 위치보다 낮은 데 박힌 수도에 연결된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해야 했다. 몸을 한껏 접고 쭈그린 채로 머리를 처박고 샴푸질을 하자면 낡고 해진 파란색 타일과 짙은 갈색이 돼 버린 줄눈이 가까이 보였다. 화장실이 곧 우리 집 형편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돈을 벌 것이다.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런 화장실은 내 생애 다시는 없어야 한다. 머리를 헹구며 이 세 개의 문장을 되뇌곤 했다. 반드시 성공해서 세면대도 있고, 넓고 쾌적한 진짜 ‘욕실’이 있는 집에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했다.
그 다짐은 확실히 단단한 원동력이 되어서, 공간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배우던 때에 욕실 디자인과 구조에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갖게 해 주었다. 욕실은 인간이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인 배설과 청결을 동시에 해결하는 아이러니한 공간인 동시에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장소이다. 원초적인 나의 모습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곳.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힘든 일에 봉착하거나 해결되지 않는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욕실에 들어가 샤워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처럼 욕실을 일종의 동굴 같은 은신처로 여기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 내고 감각을 이완하며 깊은 상념에 빠지거나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경험을 한 일이 많다.
욕실에 관한 공간관과 경험은 내가 디자인한 모든 작업에 반영돼 있다. 더 코나의 첫 번째 건축 프로젝트였던 파주 설원재의 욕실은 웬만한 마스터 베드룸보다 크다. 이곳을 처음 기획할 적부터,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선명한 풍광과 자연이 발산하는 정취를 오감으로 감각하며 몸과 내면을 깨끗이 가다듬는 너른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자연이 전면으로 보이는 큰 창을 만들고, 가족탕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깊고 넓은 욕조를 매립해 집 내부에 노천탕을 끌어온 것처럼 연출했다. 평창 소우주의 욕실은 제주도의 정원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연출하고 히노끼탕 콘셉트의 사우나 공간까지 완비했다. 그 공간에서 나와 아이들은 씻는 것 외에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반신욕을 하며 과일을 나눠 먹기도 한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괜히 짜증을 부릴 때면 "일단 욕실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다시 이야기하자"라고 말한다. 샐쭉한 얼굴로 우당탕 욕실에 들어간 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말간 얼굴로 나올 때, 녀석도 욕실 공간에서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빙긋 미소 짓는다. 이렇듯 주거 공간이나 스테이 공간을 작업할 때 나는 늘 욕실을 최우선순위에 둔다. 욕실이 클라이언트들의 ‘최애 공간’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더 코나의 시그니처 디자인을 응축해 기획한다. 나와 우리 가족이 해온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 내게 욕실이란 단순히 몸을 씻는 곳이 아니라 창의적인 사유가 흐르는 공간이기도 하고, 사색과 명상을 하는 공간이며, 가족과 함께하는 장소이다. 익숙한 ‘화장실’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의 중심이 되는 휴식처로서의 ‘욕실’이 주는 가치에 반응하고 공감하게 되면,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라도 더없이 새롭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