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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테리언니 백예진 May 31. 2024

맞아요, 저는 공사판 여자 시다예요



사장님이 된 것 같은 의기양양한 기분은 며칠 가지 않았다. 애송이의 착각임을 금세 깨달은 것이다. 사업은 실전이었다. 프로 세계의 벽은 높았다. 아무리 작은 회사일지라도 대표가 된 이상 월급 받던 직장인보다 훨씬 큰 책임감을 가져야 했고 매번 완성도 있는 결과물이 요구되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디자인 작업, 고객과의 소통, 현장 관리와 반장님들과의 조율, 주변에서 들려오는 민원 처리, 세무 처리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혼자 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는, 아니 사실 아직까지도 인테리어 건축은 ‘남자들의 분야’로 여겨진다. 최근에 와서야 여자 소장님들도 많아졌다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대표, 소장, 반장급 인력의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자인 씬이다. 여성, 그것도 ‘어린’ 여성이자 ‘초보’ 사장이었던 시기에는 그런 업계 특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처음에는 상가 건물, 혹은 아파트 건물을 관리하는 업체 소장님과의 관계 맺음이 너무나 어려웠다. 초면에 반말은 당연지사였고 대놓고 낮잡아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은근한 괴롭힘과 뒷담, 심지어는 금전 요구까지 난무했다. 분통이 터져서 같이 맞받아 치면 이런 식의 비꼬는 말이 돌아와 비수로 꽂혔다.



이래서 여자랑 일을 못해. 그러게 여자가 왜 이 일을 해?


감히 어린 여자로서 인테리어 일을 하겠다고 맨땅에 헤딩한 결과는 지독히도 아팠다. 점점 싫은 소리나 부탁을 최대한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하려 했지만,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건물 상층부까지 옮겨져야 하는 무거운 자재가 1층이나 지하로만 배송될 때라든가 이외에도 도저히 여성의 신체적 조건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는 도무지 막막하기만 했다. 가끔 현장 반장님과 의견 차이로 다툼이라도 생기면 두렵거나 위축된 마음이 들키지 않게 꽁꽁 묶어두느라 고군분투했고, 계약하러 왔다는 고객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아무래도 여자 사장이라 영 미덥지 못하네. 경험이 있긴 해요? 대학은 나왔죠?” 등의 곤란하고 무례한 질문을 퍼부은 날에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겨우 참았다가 서럽고 외롭고 지친 기분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서 중간중간 몰래 차로 숨어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힘들었던 것은 민원 대처였다. 아파트 특성상 시공하는 현장의 앞집, 아래층, 위층에는 공사 기간 동안 소음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공사 전에 미리 양해를 구했음에도, 시공 중에 민원을 넣으며 사장을 찾아온 아랫집과 윗집 주민들이 나를 보고 언성을 일부러 더 높이거나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아랫집 주민이 공사의 진동으로 본인 집 욕실 타일이 떨어졌으니 욕실 전체를 공사해 달라며 현장에 드러누워 시위하는 통에 경찰을 부른 적도 있었고, 영문도 모른 채 마치 소박 당하듯 태어나 처음 듣는 고성과 쌍욕으로 두드려 맞은 날도 있었다. 악성 민원으로 구청의 공사 중지 명령이 떨어졌던 날엔 억울함을 넘어서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자존감과 자기애가 전부 진흙탕에 떨어져 나뒹구는 것 같았다. 동료라도 있었다면 하소연할 수 있었을까, 차라리 내가 직원이면 나았을까를 상상하며 엉엉 운 날이 셀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일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2년 차, 3년 차가 되자 그간 어마어마하게 소모해 왔던 감정을 추스르고 최대한 차분한 상태로 일에 임하려 노력했다. 고객이든 건물 관리인이든 현장 반장님이든 이웃 주민이든 오해가 생겨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심지어 서로 이미 감정이 상했을 때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화를 내쪽에서 꾸준하게 시도해 매듭을 풀고자 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조금 어긋났을지언정 나중에는 외려 더 돈독해지는 사이가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또,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잘할 수 없음을 일찍이 인정하고 각기 분야에서 도움을 주실 인력들을 모셔서 스승처럼 대우하며 열심히 배웠다.



가련한 정성에 하늘이 감복했는지, 다행히도 인복은 있어서 목공, 전기, 설비, 건축 등 모든 실무자들께서 중요한 일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가르쳐 주셨고, 친구들과 지인들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가족들 역시 누구보다 크게 위로했고 열성적인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진정한 내 편들 덕에 도전적인 상황이나 변수가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어린 여성’이 이런 큰 공사를 지휘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염려하던 고객들도 매일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나와 우리 팀을 지켜보면서 점차 신뢰를 보였다. 이 일들을 도움닫기 삼아 번듯한 사무실을 차렸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나날이 가벼워지고 보람과 성취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더는 사람들의 편견이나 부당한 태도에 기죽지 않게 되었고, 그런 일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무렵에 겪은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한창 바쁜 현장 반장님들을 대신해 동네 철물점에 급하게 구해야 하는 자재를 사러 갔었다. 필요한 목록을 읊자 철물점 주인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씀하셨다. 



일반인한테 필요한 자재들이 아닌데... 어디 공사해요?

 네, 맞아요 하고 대답하자 할아버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웬 젊은 여자가 공사를... *시다여? 여자가 어쩌다 그런 걸 해?


*일하는 사람 밑에서 그 일을 거는 조수 격의 사람. 일본어의 잔재이긴 하지만 어르신들이 가끔 쓴다. 



시다라니. 그런데 어쩐지 그 말을 듣고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외려 빙긋 웃음이 나왔다. 혀를 차는 할아버지께 맞아요, 저 시다예요, 그러니까 늦었다고 혼나기 전에 물건 빨리 주세요,라고 둘러 말한 뒤 물건을 건네받고 철물점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시다는 말이 내 일을 설명하기에 아주 틀린 표현 같지도 않았다. 나는 대표이긴 하지만 동시에 직원이기도 하고,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모시며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나는 나 스스로의 시다이자 내게 인테리어를 의뢰한 고객의 시다이자 같이 일하는 현장 반장님들의 시다가 맞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젠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워졌음을 깨닫게 되어서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섭기만 했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 게 그저 즐거웠고 현장이, 또 이 일이 나와 정말 잘 맞는다고 느끼게 되어 행복했다. 시다, 시다래. 다시 피식, 웃음이 났다. 할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며 현장을 향하는 걸음 속도를 점점 빠르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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