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테리언니 백예진 Jun 04. 2024

스물 여섯, 운명처럼 다가온 인생의 레벨업



사업이 안정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 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가장 먼저 감사하게도 고객 수가 꾸준히 늘어갔다. 초반에 네이버 카페로 닦아 둔 기반을 바탕으로 우리와 공사를 진행했던 클라이언트들이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카페 게시판에 후기를 남기는 식으로 입소문이 서서히 퍼져 이뤄낸 결과였다. 



이 시기에는 입주를 막 시작한 새 아파트와 준공 연식 10년 이하 아파트들의 부분, 전체 리모델링을 주로 맡았다. 비교적 신축에 해당하는 아파트는 공사와 설계 난도가 높지 않아서 입문 단계에 접어든 내게 최적화된 조건이었다. 점점 공사 건수와 의뢰, 미팅 수가 많아지면서 클라이언트를 접대할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고, 신축 아파트 단지 상가 내에 어엿한 사무실 공간도 마련하게 되었다. 



사무실을 연 이후 점점 네이버 카페를 거치지 않고 직통으로도 공사 의뢰가 곧잘 들어오자, 나는 조금 더 전문적인 인테리어 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해 공식 웹사이트 개설을 고민하게 되었다. 네이버 카페와 입소문만으로는 ‘코나’라는 브랜드를 전면적으로 보여주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 결단하기는 어려웠다. 지금이야 웹사이트 개설 프로그램도 있고 혹은 개설을 돕는 전문 업체 비용도 아주 높지 않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웹사이트 오픈이란 가게를 하나 차리는 것만큼 비용과 수고, 부담감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유학과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차대한 일들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사업이 자리가 잡혀가고는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을 향한 갈망이 늘 가득한 나로서는 사업을 하는 동안 스스로의 부족함과 한계를 느낀 때가 많았다. 물론 고객들은 만족스러워하셨고 주변에서도 모두 내게 잘하고 있다고 했지만,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나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더 참신한 것을 두고 함께 토론해 줄 이가 절실했다. 그럴 때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디자인을 배우고 토론하고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해외 레퍼런스를 연구하다 보면 그곳 디자이너들은 실내 공간 인테리어뿐 아니라 제품이며 가구 디자인, 건축과 랜드스케이프 조경까지 넓은 분야를 아울러 섭렵하고 있었고, 그들을 보면 부러움과 호기심이 들끓었다. 



디자인 스쿨로 명성 높은 영국이나 이탈리아 등의 유럽권 국가의 학교로 진학해서 도시 전체가 유산으로 남아있는 곳들을 거닐며 시시때때로 건축물과 디자인을 탐구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싶었다. 학부 때 배웠던 천편일률적인 커리큘럼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고 조금 더 예술과 결합된 프로그램들을 수강하고팠다. 하지만, 문제는 또다시 비용이었다. 이 시기 우리 집 형편은 학창 시절 때보다 약간 나아졌을 뿐, 석사 유학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사업으로 번 돈도 기존의 생활을 유지하고 조금씩 저축할 수 있는 정도였지 대단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내 고민을 금세 알아챈 엄마는 초기 비용을 어느 정도 보태주겠다며 이후 유학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도전해 보라고 하셨다.  



물론 비용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었다. 내게는 서로 미래를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유학을 간다면 5년 동안 만나온 그와 처음으로 긴 시간 떨어져 있게 될 것이었고,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상황이 바뀌거나 변수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결혼을 한없이 미루게 될지도 몰랐다. 비단 사업과 유학이 아니더라도 결혼을 이 시점에 정말 해야 하는지, 결혼을 하게 되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매일밤 생각했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해답 없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들이 가시질 않았다. 



어느 날, 마음과 시간을 내어서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이 사람과 결혼할 때 갖게 될 장단점' 10개를 종이 위에 하나하나씩 적어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단점은 5개에 불과했고, 장점을 쓸 때는 종이 위에서 펜이 춤을 추듯 15개 정도를 술술 써 내려갔다. '결혼이 아니라 유학을 꼭 선택해야 하는 이유'와 장점을 적어 보았는데 이 부분은 지지부진했다. 수중에 있는 엄마의 통장을 탈탈 털고 가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어렵게 유학을 다녀온들 유학 이후의 내 삶이 그 모든 것을 보상할 수 있을까. 급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확신이 적었다. 이미 시작한 사업이라는 공을 더 잘 굴리고 키워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는 편이 빠른 길일 수 있어. 한국에서 해 보자,라는 한 줄기 희망을 잡아챘다. 그렇게 나는 결혼이라는 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첫 아이가 생겼다. 너무도 기다렸던 소식이자 축복이었지만, 솔직히 전혀 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회사를 조금 더 안정화하고 아이가 생겼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불안감이 갑자기 찾아들기도 하고 앞으로 육아와 일을 어떻게 병행해야 좋을지 주변에 조언 구할 선배마저 없어서 내심 착잡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 소식을 듣고 행복해하는 가족들을 보니 이 또한 언젠가는 분명 거쳐야 할 관문인 것, 조금 이르게 들어서게 됐으니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되리라고 스스로를 다잡게 되었다. 



태교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여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출산 이후의 삶과 일을 어떻게 꾸리고 성장해 나갈지 정리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물론 일을 아예 쉰 것은 아니고 감당 가능한 선에서 지속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평소보다 여유로운 자세와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려 했다. 아이가 함께할 우리 세 가족의 모습과 한 뼘 더 성장해 나갈 회사, 또 코나라는 나의 브랜드가 펼쳐갈 앞날을 매일 그렸더니, 마치 아주 가까운 현실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그렇게 열 달이 흘렀다. 흔히들 출산이 임박한 막달이 되면 일을 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내가 그럴 줄 알았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한데 웬걸. 출산 하루 전까지 밀려드는 상담으로 쉴 새 없이 전화통을 붙들어야 했다. 상담 일을 끝내자마자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고, 아이를 낳고 조리원으로 옮긴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는 평상시처럼 노트북으로 디자인 업무를 보고, 다시 전화 상담을 맡았다. 



그때는 아직 몰랐다. 시간이 조금은 더 남은 줄 알았다. 가까운 미래인 줄만 알았던 ‘워킹맘’이 이토록 빨리 현실이 되어 다가온 줄은, 그리고 이 모습이 고작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전 12화 맞아요, 저는 공사판 여자 시다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