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제대로 해 보겠다 마음먹고 돌아온 일상은 분주해졌다. 차일피일 미루던 정식 사업자명부터 정해야 했다. 요즘에야 사업자명을 정하는 것부터가 중요한 기획이자 브랜딩의 첫걸음으로 여겨지지만, 15년 전의 나는 브랜딩이니 기획이니 하는 분야엔 영 문외한이었고 그런 것을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선 무작정 인터넷 영어 사전을 띄운 뒤 A부터 Z까지 알파벳별로 영단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공간 디자이너로서의 나 자신과 내가 만들고 싶은 회사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을 만한 단어들을 골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공간으로 하여금 사용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은 마음을 C(Comfortable과 Circulation)와 연결 짓고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공간을 만들기 바라는 소망을 O(Origin과 Only)에, 식물과 돌, 햇살 같이 자연적 요소로 자연스러운 공간을 연출하고자 하는 지향점을 N(Nature와 Natural)에, 마지막으로 감각적이며 대체할 수 없는 디자인을 공간에 입히고자 하는 열망을 A(Art와 Ardor)에 담아 4개의 알파벳 C, O, N, A를 조합한 CONA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코나. 뜻도 좋아야 하지만 부를 때 발음하기 쉽고 한번 들어도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짓고 싶었으므로, 두 글자로 간결하게 떨어지면서 둥글고 편안해 보이는 인상을 주는 코나라는 이름이 나로서는 썩 맘에 들었다.
다음 스텝은 네이버 카페 개설이었다. 당시 주거 인테리어 업체들 사이에서는 네이버 카페가 최고의 온라인 마케팅 플랫폼이자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다. 아파트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 인테리어 업체를 찾는 30대 ~ 50대 여성 고객들이 모여서 일상과 업체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들이 모두 네이버 카페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코나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개설했다. 내 이름 석 자에 ‘대표’라는 직함까지 붙여 내건 카페의 메인 페이지를 처음 열었던 날의 기분은 여전히 생생하다. 정말 사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 같았다. 아직은 나 외에 아무도 존재를 알지 못하고, 방문자도 없는 신규 카페였지만 설렘과 긴장이 복합적으로 얽혀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을 보냈다.
카페 개설은 시작에 불과했다. 콘텐츠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너무 신생 업체이다 보니 카페에서 보여줄 자체 콘텐츠가 없었다. ‘구경하는 집’을 몇 번 해본 것은 포트폴리오로 인정되지 못할 만큼 작은 일이었기 때문에 올려도 영향력이 없고 되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나’에서 출발해 보기로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고, 잘할 수 있는 인테리어 스타일을 보여주는 국내외 레퍼런스와 공간 디자인 관련한 뉴스, 화보 등 다양한 정보들을 끌어와 꾸준히 업데이트하기로 계획했다. 게시판 카테고리를 거실, 주방, 욕실, 드레스룸 등 공간별로 만들고 각 카테고리 속 공간과 연관된 소식과 이미지들을 출처와 함께 차근차근 올렸다. 대학 시절 작업했던 프로젝트들도 중간중간 기록으로 남겼다. 마치 지금의 인스타그램처럼, 네이버 카페를 보면 백예진이라는 대표 개인과 이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가 추구하는 인테리어 방향성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비록 사무실은 없었지만, 나는 집을 사무실이라고 생각하며 직장인만큼 엄격한 루틴을 만들고 꼬박꼬박 지켰다. 7시 반에 일어나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출근 준비를 마친 뒤 9시가 되기 10분 전에 책상에 앉았다. 오전에는 주로 그날의 특기할 만한 새로운 공간 디자인 정보를 끌어와 카페에 업로드하고,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과 아이덴티티가 잘 드러나는 공간 이미지를 서칭 한 뒤 적절한 글을 덧붙여서 카페 접속자들 눈에 잘 보일 수 있도록 배열하는 작업을 했다. 네이버 카페는 나의 온라인 사무실이자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타깃 고객들이 모인 대형 카페에 매일 들러 홍보 활동을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달 정도 흐르자 그들 중 몇몇이 내 카페에 방문해 댓글을 달거나 문의를 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디자인 스타일을 알아봐 주고, 좋다고 호응해 주는 댓글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소중하고 신기해서 더 잘하고 싶었다.
오후에는 전단지 배포를 하러 나간 날이 많았다. 학부 때 잠시 배웠던 툴을 이용해서 전단지를 디자인하고, 인쇄비를 아끼기 위해 집 프린터기로 출력해서 투명 테이프로 수제 코팅을 했다. 그렇게 만든 300장가량의 전단지를 넣은 백팩을 둘러메고, 나는 날마다 다른 아파트 단지로 가 꼭대기층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현관문마다 전단지를 붙이는 ‘동타기’ 작업을 했다. 어떤 날은 비장했지만, 사람 맘이라는 게 어떤 날은 허무하기도 했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새 퉁퉁 부은 다리를 부여잡고 이런 걸 한다고 효과가 있긴 할까 반문한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잠시 쉬면서 스스로에게 ‘노 프라블럼’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매일 카페에 올리는 사진 속 공간들처럼 내 손끝에서 태어날 멋진 공간을 상상해 보라고, 지금 이 수고가 바로 그 공간을 만들어 줄 거라고 다독였다.
전단지를 배포하지 않는 날에는 서울이나 경기도에 새로 생긴 공간이나 전시를 보러 돌아다녔다. 평상시에 늘 눈과 귀를 열어두었다가 카페, 베이커리, 헤어숍, 동물병원, 전시장 등 관심 있는 공간이 오픈하면 상공간이든 병원이든 어디든 유형을 가리지 않고 방문했다. 전체적인 콘셉트와 톤 앤 무드가 어떤지, 메인 컬러와 포인트 컬러는 어떤 것인지, 마감재와 조명은 무엇을, 왜 썼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기록하며 홀로 스터디를 지속했다.
그렇게 3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자, 카페 속 댓글을 넘어 면대면으로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슬슬 만들어졌다. 사무실이 없었던 나는 고객이 계신 어디든 찾아가는 서비스로 일했다. 무료 견적 서비스를 내세워서 여러 현장을 다니며 견적을 상담하고, 맛보기처럼 인테리어 일부를 시안으로 만들어 제안하는 성의도 보였다. 물론 열정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는 희미해 보이는 때가 많았다. 당일에 미팅을 잊고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아예 연락이 두절되는 것은 예사였고, 2시간 거리의 미팅 장소에 도착했더니 나 외에 타 인테리어 업체 여럿을 불러 그룹으로 상담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치 회사의 압박 면접장 같은 민망한 상황에서 애써 웃으며 이야기하는 일이 어려웠지만 꾸역꾸역 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일은 별것 아니라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씩씩한 혼잣말을 하며 긁힌 자존심을 어르고 달랬다. 고객을 찾아가는 서비스와 진심이 통할 날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공사 의뢰가 들어왔다. ‘코나디자인’ 네이버 카페를 흥미롭게 보았다며 새 아파트의 부분 시공을 맡기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현장은 막 입주를 시작한 신축 아파트였는데, 클라이언트는 현관에서 거실로 향하는 긴 복도가 지루하게 느껴진다며 복도가 포인트 월처럼 보일 수 있기를 원했다. 드디어 일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첫 계약서를 쓴 날,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요동쳤다. 홍당무처럼 붉은 얼굴은 화장으로도 감춰지지 않았고 펜을 잡은 손가락이 달달달 떨렸지만 겨우 태연한 척하며 사인을 마쳤다. 마침내 내 인생의 첫 공사를 정식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현장에 가 보니 과연 복도가 좁고 긴 데 반해 별다른 특징이 없어서 공간의 효율성이 낮고 밋밋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사각 프레임 틀을 만들어 볼록 튀어나온 몰딩으로 장식하는 웨인스코팅 기법으로 유럽식 복고풍 인테리어를 구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복도에 입체감과 클래식한 고급미를 더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면서 너무나 떨리고 걱정되기도 했지만, 시공팀을 철저하게 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해둔 덕에 지연이나 돌발 상황 등의 이슈 없이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도 아주 높았고, 계약서에 기재된 공임비도 정확히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애 첫 단독 프로젝트를 무사히 치르고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까지 받은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로 어른이, 한 회사의 대표가 된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생기는 일들이 뭐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