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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테리언니 백예진 May 24. 2024

대기업 디자인팀이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없어졌다고요?




겨우내 버틴 나의 꽃씨들이 새싹을 틔우기도 전에, 대우조선해양의 크루즈 선실설계디자인팀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당시 그 회사의 대표가 큰 비리에 연루돼 수사 중이라는 뉴스가 몇 주 동안 흘러나왔지만, 대기업이라면 비리 뉴스 따위 으레 있는 일이니 내 취업과는 상관이 없을 거라고 애써 믿었다. 회사 공식 웹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시시때때로 채용 공고가 올라왔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3월이 다 가도록 신입 공채 공고는 올라오지 않았다. 며칠 뒤, 취업 커뮤니티 카페에서 대우조선해양의 선실설계디자인팀이 없어졌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소식도 아닌데, 막상 그 글을 보고 나니 믿기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다가 3월의 마지막 날 대우해양조선으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 센터에서 시작된 내 문의 전화는 여러 명의 담당자를 이리저리 둘러서 어렵게 인사팀 직원에게 닿았다. 정작 그와 전화가 연결되자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끄집어내어 가까스로 물었다. 



“뉴스를 봤는데요. 선실설계디자인팀이 정말 없어진 건가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몇 년 같았다. 인사팀 담당자는 “없어졌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기타 상황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확인 사살과 다름없었다. 너무나 황당했다. 올해는 봄이 올 줄 알았는데. 왜 춥고 혹독한 겨울은 끝나지 않는 걸까? 방에 틀어박혀 몇 주를 황망하게 보냈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1년 가까운 취직 준비가 물거품이 되었고 우리 집 형편도 그대로인데 나는 어느덧 20대 중반이 돼 있었다.



막막했지만 언제까지 좌절할 수만은 없었다. 다시 무언가를 해야 했다. 다른 대기업을 준비하든, 다시 중소규모의 스튜디오에 취직을 하든 새로운 길을 내어야 했다. 한 달가량의 긴 고민 끝에 독립적으로 ‘구경하는 집’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구경하는 집이란, 새로 준공해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에 샘플하우스를 만들어 두고 구경 온 사람들의 공사 의뢰를 받아 리모델링을 진행하는 방식의 인테리어 사업이었다. 작은 규모이지만, 일종의 사업에 뛰어들어야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 됐을 무렵 구경하는 집 사업을 시작하신 엄마를 아르바이트 삼아 몇 번 돕고 좋은 피드백을 얻었던 경험이 당시 지쳐 있던 내게 큰 힘으로 다가왔다. 주거 인테리어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보람도 느껴 봤으니 잘될 거야. 나는 빠른 실행력으로 구경하는 집을 차렸다.   



그리고 6개월 정도 흘렀을까. 매일 성실하게 출근했지만, 나의 구경하는 집에는 하루에 많아야 한두 명 정도의 손님이 찾아왔다. 하루종일 입을 열 일이 없어서 입에서 단내가 나는 날도 많았다. 그나마 드문드문 오는 사람들도 공사 의뢰까지는 쉽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너무 외롭고, 이렇게 있다가는 우울증이 생길 것 같았다. 이곳을 당장이라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떠나지?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로, 될 수 있는 한 오래가자. 아프리카로 갈까? 당장 휴대폰을 열어 검색했지만, 아프리카는 그림의 떡도 못 될 만큼 비쌌다. 저렴하게 갈 수 있는 나라를 알아보다가 인도를 발견했다. 한 달 여행에 200만 원이면 풍족하다니. 그래, 터닝포인트가 생기지 않으면 직접 만들자. 바로 인도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러나 인도 배낭여행은 첫날부터 쉽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불평거리였다. 거리는 더럽고 공기는 매캐하고 사람들은 불친절했다. 이유 없이 친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 끝에는 항상 사기를 치려는 수작이 있었다. 주위를 경계하느라 자동으로 예민해졌다. 게다가 음식도 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날은 너무 더웠다. 의지할 데라고는 여행에서 만나 함께하게 된 사람들이 전부였다. 저마다 직업과 나이가 달랐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모두가 똑같은 여행자였고, 동료였다. 우리는 같이 사막을 건너고 짜이를 마시고 커리를 먹고 울고 웃으며 밤낮으로 긴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인생을 응원했다. 동료 여행자들과 함께면 낙타도, 무더위도, 사막에 산다는 전갈도 무섭지 않았다.    



한편 인도에서는 모든 대화의 시작과 끝이 “노 프라블럼”으로 통했다. 릭샤왈라도, 짜이왈라도 식당 주인아저씨도, 거리의 걸인들도 모두가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목적지를 착각하고 정 반대 방향으로 데려다준 릭샤왈라에게 따져도 노 프라블럼. 직원의 실수로 내 음식이 잘못 나와도 노 프라블럼.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우려는 의도가 명백한 상인에게 항의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노 프라블럼이었다. 그것도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웃는 얼굴을 하고는. 처음엔 의아했고, 며칠 지나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일주일쯤 되자 노 프라블럼이라는 말이 그냥 싫고 화가 났다. 맥락도 논리도 없잖아. 도대체 뭐가 노 프라블럼이라는 거야. 모든 게 프라블럼뿐인데!



그러다 가만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니, 이곳에서 화를 내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리고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주문한 국수를 만들다 국수 삶는 것을 잊어버리고 국물만 줘 놓고는 웃으며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했던 직원은 주방으로 돌아가서 내게 줄 국수를 뒤늦게 삶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문제 될 게 없지. 어쨌든 다시 하면 되잖아. 대기업 디자인 팀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인생이 프라블럼이 된 건 아니잖아. 작은 주거 공간 디자인을 한들 뭐가 문제야.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 될 게 없어. 노 프라블럼이네, 노 프라블럼.



도피처럼 떠나온 여행지에서조차 어느 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어서 내심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그날 드디어 한국으로, 내 자리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다. 불평과 불만, 불안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비워지며 차분해졌다. 그래도 내게 남아 있는 일들이 있지. 그러니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돌아가면 잘할 자신이 있었고, 누가 뭐래도 갈 수 있는 데까지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 보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노 프라블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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