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테리언니 백예진 May 21. 2024

바다 위를 떠 다니는 호텔을 디자인할래




휴일과 주말이 없다시피 출근하며 회사를 다니자 나는 삽시간에 올라운드 멀티플레이어로 거듭났다. 규모가 큰 건축디자인사무소에 취직했지만 아직도 사수를 보조하며 겨우 현장 실측을 돕는 대학 동기들에 비해서 훨씬 빠른 속도로 일을 배웠을 뿐 아니라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자, 성취감보다는 더 큰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올랐다. 나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사수 밑에서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은데 이곳은 그러기에 어려운 여건이었다. 작지만 내 힘을 발휘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곳에서 버티기와 방대하고 넓은 세계로의 모험. 긴 고민 끝에 나는 후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입사한 지 1년이 조금 지나 퇴사를 하고 다시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해도 대학 졸업 직후에 취직을 준비했던 때와는 시야나 마음가짐이 사뭇 달랐다. 짧지만 밀도 높은 실무 경험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대기업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한층 높은 급여와 복지 수준도 대기업에 가고 싶은 이유 중 한몫을 차지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소업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규모감 있고 전문적인 분야의 디자인 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마침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바로 대우조선해양의 선실설계디자인팀이었다.



퇴사 직후 드디어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 오랜만에 대학 동기를 만난 날이었다. 그간의 안부도 묻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일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됐다. 건설 설계 업체에 다니는 그 애는 최근 회사에서 선박의 객실 공간 디자인 일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그 애의 직속 선배들이 귀띔해 준 바로는 업계에 선박 디자인 일이 많아질 것 같다고 했다. 선박 디자인이란 분야는 들을수록 흥미로웠다. 어릴 적부터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크루즈 여행을 종종 꿈꾸기는 했지만 내 일과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영화 <타이타닉>이나 해외여행 다큐멘터리 속에 나오는 초호화 크루즈를 내 손으로 직접 설계할 수 있다니. 심지어 크루즈는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바다를 유영하는 생동감 있는 공간이잖아. 이 얼마나 특별한 공간인가. 아, 얼마나 재미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일은 아닐까?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동기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은 크루즈로 꽉 차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벗어던지고 노트북을 열어 ‘크루즈 디자인’을 검색했다. 정말로 업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일반 선박의 2~3배에 달하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크루즈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국내 대형 조선사들이 잇따라 사내에 크루즈 전문 디자인 팀을 구성하고 업계 톱 수준의 전문가들을 자문 위원으로 초빙해 직원들 상대로 교육까지 하고 있었다. 그중 특히 내 관심을 끈 회사는 대우조선해양이었다. 좀 더 찾아보니, 대우조선해양의 크루즈 선실설계디자인팀에서 매년 공채를 내어 건축과 실내 인테리어 학과 출신의 직원을 채용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야. 이곳이 나의 다음 직장이 되리라는 완전한 확신이 섰다.  



다음 공채는 1년 여 뒤인 다음 해 3월에 뜰 것이었다. 그때까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중요도 순으로 쭉 적었다. 가장 먼저 서류 접수 자격을 위한 토익 점수부터 마련해야 했다. 이튿날 나는 당장 강남으로 달려가서, 그간 회사를 다니며 모아 둔 돈 일부를 털어 유명 토익 학원의 점수 보장반에 등록했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토익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5시에 수업이 끝나면 11시까지 자습을 하며 동시에 자기소개서 등의 서류 준비를 했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중요한 포트폴리오 정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는 바다 위를 떠 다니는 초호화 크루즈를 디자인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선배들의 말을 놓칠세라 하나하나 메모하는 내 모습, 선박 안을 거닐며 탐구하는 내 모습, 설계 도면을 그리는 내 모습, 자재 샘플들 속에 파묻혀 공부하는 내 모습… 선실설계디자인팀은 선박의 모양과 면적, 구조를 고려해 객실 수와 위치, 크기를 정하고 공용 공간인 선상 수영장과 연회장, 레스토랑, 파티룸, 사우나, 선원들의 공간 등 선박 내 모든 공간을 디자인한다고 했다. 크루즈에 어울리는 무드의 인테리어와 고급 가구뿐 아니라 물에 닿아도 내구성을 잃지 않는 특수 자재들의 스펙과 특성까지 빠삭하게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입사하면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보였고, 그래서 더 좋았다. 매일매일 몸이 뻐근했지만 마음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흘러 눈발이 날리는 늦겨울이 왔다. 모든 것이 착착 준비돼 가고 있었다. 토익 점수가 쑥쑥 오를수록 자신감도 쑥쑥 올랐고 어서 꽃 피는 3월이 찾아오기만을 바랐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환경적으로 변한 건 없었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마음이 따뜻한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3월이 오면, 내 인생에도 드디어 꽃이 피겠지 싶었다.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새해를 맞게 될 거라 생각했다. 대우조선해양의 비리 뉴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이전 08화 생초짜 신입인 저더러 100억짜리 건물을 지으라고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