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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동하다 Apr 11. 2021

어느 날 내부에서 들려온 재난 경고

매몰주의


영화의 흔한 도입부에서 어릴 때 반짝이던 꿈을 가진 주인공은 어느새 일상에 '매몰'돼 살아가고 있다. 

일상에 매몰된다는 개념을 논술학원에서 실존주의를 수업할 때 들은 적이 있다. 많은 개념을 들었지만 텍스트 한번 읽어보지 않은 채 졸기 일쑤였던 그 수업에서 남은 말은 '일상에 매몰됨' 정도였다. 그 뒤에 뭔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획안을 쓸 때나 편지를 쓸 때도 그 단어를 막연하게 썼다. 


하지만 지금 그 단어를 들으면 숨이 턱 막힌다. 이제는 쉽게 쓸 수가 없다. 

'매몰하다'를 초록창에서 찾으면 수많은 성형외과 광고 아래로 국어 사전의 뜻이 등장한다. 보이지 아니하게 파묻히거나 파묻다. 재난이나 사고에서나 등장하는 서술어가 일상이라는 말과 붙어 쓰이다니... 어쩌면 가장 끔찍한 재난을 매일매일 겪고 있는 거 아닐까. 


4월의 어느 금요일 점심 여의나루역 근처의 한강공원. 점심을 쪼개 나온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봄동


이십대 초반부터 "너는 너무 바빠"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가장 부러웠던 사람들은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사는 사람이었다. 언제 시간 되는데? 라고 물으면 나야 언제든 되지. 너만 시간 내면 돼, 라고 대답하던 이들을 말이다. 

대학교 때 들어갔던 동아리 학교방송국에는  월, 금 전체 출석 일정이 있었고 그것과 별개로 각자의 정규방송을 마감하는 시간이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의 방송을 피드백하는 시간까지 마감이 많았다. 한 주에 마감만 두세차례가 있었던 셈이다. 일년에 두 차례 방송제를 앞두고는 방송제를 위한 마감은 주7일이 될 때도 있었다. 밤을 새는 일도 많았고 2주에 한 번씩 10분 분량의 정규 방송을 마감하기 위해서는 기획안 작성-섭외-사전인터뷰-콘티작성-촬영-자막 완성-편집까지 바쁘게 보내야했다.  사람이 많이 나가는 동아리의 특성상 일년에 네 차례 수습 국원을 뽑는데 나는 첫번째 차례인 3월에 들어왔다. 나와 함께 들어온 5명 중 3년이 지나고도 남은 사람은 나 한 명이었다.  51기 국원들은 1차, 2차, 3차, 4차라는 말로 불렸는데 가끔 선배들이 "너도 1차니? 고생 많았다"는 말을 들었다. 쑥쓰러운듯 말끝을 흐렸는데 결국 이 공치사를 받기 위해 나는 1학년의 가장 여유로웠던 순간들을 바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아리를 하기 위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수업을 포기했다. 이 일을 잘하기 위해서라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저 내게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동아리 일을 하면서 학점도 좋은 사람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누군가 수업을 빠지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다고 할 때는 '나는 괜찮아'하면서 수업을 빠졌고 그렇다보니 경영학과에는 유독 비중이 높은 조모임도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고 시험 전날에도 촬영을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학생으로서의 내 생활은 엉망이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노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후배들에게는 무조건 선배가 모든 밥과 술을 사는 문화 때문에 과외도 했다. 


반 동기들이 모여서 '잉여'로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틈'을 내어 거기도 꼈다. 처음부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잠시 틈을 내어 참석해 모든 에너지를 발산한 뒤 허겁지겁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아쉽다는 인사와 함께. 뒷맛이 쓸 때도 많았지만 애초에 바쁜 생활을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미 우리 동아리는 응원단과 함께 '빡센 동아리'로 정평이 났고 많은 이들이 최소 한 두번 정도는 그만둔다고 잠적을 하거나 실제로 그만둘 때마다 나는 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다시 데려오는 역할이었다. 한 번도 그만둔다는 말조차 못해봤다. 나는 그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은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끝을 맺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는 게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잘 사는가 확인을 하고 싶을 때 그 시절 캠퍼스를 찾는다. /봄동

12년을 알아오는 동안 줄곧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대학 동기는 나에게 '노동의 생산성'을 너무 믿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가 할 일에 책임감을 다 했을 뿐인데 이제는 그게 미련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주6회 마감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여전히 금요일 저녁의 만족도는 그주 어떻게 일을 했는지, 상사로부터 어떤 피드백을 들었는지가 좌우한다. 무엇보다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고 나니... 미련함 뿐만 아니라 죄책감이 더해졌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해줬는데 최근처럼 솔깃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존버의 신화', '경단녀에 대한 두려움'들보다는 사실 나는 '중간에 포기한 사람'이라는 말을 제일 무서워하는 것 같다. 


좋아하는 일도 찔끔찔끔 해본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 책임감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후순위가 된다. 그런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말해줬다. 이러다가 노인 소설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어영부영 지금처럼 시간을 보내다가는 다 은퇴하고 나서야 글을 쓴다고 시동을 걸고 또 늦었다는 것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너무 반전 없는 이야기라 웃음이 나왔다. 일상에서 온 재난 경고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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