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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솔 Jan 25. 2019

마고와 리치와 점심

<로얄 테넌바움> 2001

가끔 영화를 먹으며 아니 밥을 먹으며 영화를 본다. 일전에 친구 M과 한슬이가 각각 <로얄 테넌바움>이 참 좋았다고 말해준 것이 기억났다. 그 날의 점심은 그 영화가 되었다. 밥은 20분이면 다 먹는데, 한 동안 20분이 지나더라도 계속 봤던 영화는 없었다. 오랜만에 계속 보게 되는 영화를 만났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내 스타일. 추천해준 두 친구에게 아주 고마워버린다.


모든 인물이 나의 일부와 닮아 있었지 특히 마고 테넌바움에게 자꾸 눈이 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마고는 유별난 비밀로 가득하다고 설명된다. 그는 담배도 꼭 어딘가에 숨겨놓고 피곤 한다. 극작가인 그녀는 9살에 상금 5만 달러를 받은 사람이지만 7년째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살지만 화장실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한다. 스스로 가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외로움의 반증. 마고는 어딘가 공허한 것이 틀림없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알 수 있다.


사실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마고를 비롯한 삼 남매의 어린 시절로 유추하는 것이다. 마고는 유일하게 입양된 자식이다. 아빠인 로열 테넌바움은 사람들 앞에서 소개할 때 그것을 꼭 언급했다. 남동생 리치 테넌바움과는 9살 겨울방학 때 가출해서 아프리카 전시관에 숨어 지낸 일이 있었다. 작은 침낭에서 과자와 크래커로 버텼다. 귀여워 보이지만 나중에 벌어진 감정을 보니 그들에겐 꽤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기억이었으리라. 리치는 그 후로 그림을 좀 그렸는데 모두 마고의 모습이었다. 둘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진 듯했고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라는 관계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지도 표현하지도 못한 채 자랐다.


마고의 똑 단발과 헤어핀, 스모키 화장, 모피 외투는 9살 때나 30대나 그대로다. 물론 다른 형제들도 어린 시절 패션 그대로다. 아이들은 몸만 컸다. 어릴 땐 영재 소리도 듣고 나름 재밌었는데 커 보니 대단한 건 없고 어릴 때 못 받고 못 준 사랑만큼 뚫린 구멍에 바람만 드나든다. 그 바람은 외로움이다.





나는 비밀이 좋다. 그래서 비밀스러운 마고가 좋았다. 비밀은 안쓰러운 이유로 만들어지지만 나름의 희열과 소소한 재미가 있다. 만약 영화가 끝내 마고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났어도 나는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비밀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이 좋다. 비밀을 가진 사람은 필히 외로울 것이지만 저마다 제 모양의 외로움을 갖고 있으니 특이하거나 특별한 건 아니다.





마고를 좋아하는 만큼 '마고와 리치'를 좋아한다. 리치 방에는 텐트가 있다. 대부분의 아이가 비밀 아지트를 좋아하듯 그의 노란 텐트 안은 모험과 아기자기함으로 가득하다. 그곳엔 9살 때 마고와 아프리카 전시관으로 도망쳐서 머물렀던 침낭이 있다. 방 벽에는 마고를 그린 그림이 잔뜩 걸려 있다. 마고의 남편이 마고를 수상히 여겨 뒷조사를 했을 때, 12살부터 30살까지의 마고의 사생활이 드러났었다. 리치가 모르는 것들 투성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참 많은 색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었었다. 어쩌면 마고의 남편이 느낀 배신감이 더 커야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 마고와 함께 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리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낀다. 여기서 배신감과 자괴감은 아주 다른 모양이다. 우울한 리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면도칼로 팔을 여러 번 긋는다. 



"I kill myself tomorrow"라고 속삭이고서, 말 그대로 해버리는 장면이 왜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다. 과묵하고 떠돌기만 했던 리치의 감정들이 폭발해버려서 시원한 것이다. 무언가 많이 삼켜온 조용한 사람의 복잡하고 커다란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주 나쁜 방식이었지만, 이후에 리치는 가벼워졌으니까. 둘은 노란 텐트 안에서 서로 사랑을 고백했다. 비밀스러운 마고는 둘의 감정을 비밀로 간직하자고 했지만 옥상에서 리치에게 비밀의 상징인 담배를 건넨다. 둘은 담배를 함께 태웠다. 7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마고는 새 연극을 써서 올렸다.





환상적인 점심을 마쳤다. 나는 밥이 소화되는 시간보다 훠얼씬 오래도록 하나의 영화를 소화시킨다. 아직 로열 테넌바움의 이야기는 손톱 옆에 난 가시만큼만 했다. 다른 작은 것들도 많은데 왜 손톱 옆 가시로 비유했냐면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아프지만 언젠가 깨끗해질 상처를 가진 사람들. 앞으로 여행과 마고 빙의 등 내 삶에 이 영화를 녹일 시간이 한참 남았기에 글을 이쯤 마친다. 마고의 Bitch face를 사랑하며, 정말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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