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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seul Jul 21. 2020

[20191219~20191220]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미션: 노보시비르스크에서 9시간 동안 시간 때우기

매우매우 바빴던 여행 당일 날 오전.

나는 당시 미국 대학원에 지원서를 넣는 중이었는데 여행 전에는 지원을 모두 끝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게으름 하면 나 아닌가? 아니나다를까 미루고 미루다가 당일날 아침까지 마지막 3개 대학에 지원하지 못한 상태였다. 배낭도 다 패킹해놓지 않았는데 말이다. 일찍 일어나기는 했는데 유투브와 웹툰을 보느라 시간을 낭비한 탓이었다. 뭐든지 미루는 이 고얀 습성 때문에 나는 말 그대로 "부랴부랴" 지원을 끝냈고, 겨우 짐을 챙겨 집밖으로 나섰다.




경유지인 노보시비르크로 가는 비행기는 밤 10시 40분 출발.


그래서 친구 C와 공항에서 8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이날따라 엉뚱하게 공항버스 정류장과 시간표까지 착각해버려서 8시 30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C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당시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는 나 혼자였는데, 기사아저씨께서 택시비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능청스레 농담을 건네셨던 게 기억난다. 마음이 급해 제대로 호응해드리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살짝 죄송하기도 하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그렇게 도착한 인천공항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일단 체크인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4번 출국장이 공사중인 바람에 우리는 또 다시 한 시간을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22:10까지 보딩인데 22:25가 다 되도록 줄에 서 있어야 했다. 그 때 혜성같이 나타난 한 언니를 졸졸 따라가지 않았다면 비행기를 놓치는 불상사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거다.


딱 보안검색대 앞에 서자 항공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출발이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오라는 것.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우리는 그 때부터 앞사람들한테 please를 시전하며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자동출입국 심사에 줄이 없었다는 것 정도?


내 친구 C는 면세품 수령도 포기한 채 탑승장으로 뛰어들어갔고, 우리는 출발 10분 전 아슬아슬하게 보딩완료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사람들이 타는 것을 보고 "뭐야..." 싶기는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타고, 경유지인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노보시비르스크 공항 내부는 엄청 깔끔했다.


노보시비르스크에는 새벽 3시 도착.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경유편까지 거의 9시간이나 남아있었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했다. 일단 너무 배가 고파 러시아식 만두인 펠메니를 먹었다.


공항음식이어서 그런가 맛이 없었다. 노맛 펠메니 냠냠


배를 채우고 나니 슬슬 심심함이 올라왔다. 그래서 배운 것이 고스톱. 스리랑카에 있는 H에게 구박받지 않기 위해 C가 나에게 특별히 레슨을 해준 것이었다. 쌍피, 그림, 광, 단 등.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 아니라고 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시간이 안 가서 C가 심심풀이로 다운받아온 로니쳉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봤다. 엄청 취향저격이었다. C와 나는 조용한 대합실에서 터지는 웃음을 비식비식 참으면서도 로니쳉을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주변 사람들 눈에 꽤나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앞줄에는 고양이가 있었는데, 먼지괴물 같은 귀여운 러시안 블루였다. 둘다 고양이 덕후인 C와 나는 '러시아에서 러시안 블루라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집사분께 말걸기가 민망해 사진은 못 찍어왔지만.




앉아서 새우잠도 자고 공항 안에 들어온 새도 구경하고 하다가 11시 40분이 되어 보딩 시작.


한겨울인지라 루스끼들은 모두 주섬주섬 외투를 입고 탑승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당당히 비행기에서 내린 그대로 샌들을 신고 내려갔다. 당연히 탑승장과 비행기가 연결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비행기가 글쎄 눈덮힌 아스팔트 저 멀리 있었다.

 


털신발은 거추장스럽다며 쿨하게 배낭에 넣어 부쳐버린 우리이기에, C와 나는 꼼짝없이 맨발을 내놓고 눈밭을 걸어가 비행기를 타야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뻘하니 웃음이 터졌다.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발 사진도 찍었다.


그러고 있는데 누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잘 웃지 않는 루스끼가 웃는다니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봤더니, 포니테일을 한 루스끼 언니와 그 앞에 있던 아저씨가 우리를 뒤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민망했지만 이런 게 다 추억이다 싶었다.


이 상황에 우리가 샌들을 신고 있는게 너무 웃겼다.


아저씨랑 언니를 따라 비행기 탑승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루스끼 아저씨가 나보고 뭐라고 하는 거다.

샌들에 묻은 눈을 비행기 입구 턱에 쓰윽쓰윽 닦아 내고 있던 나는 '엥...?'하는 맹한 얼굴로 아저씨를 쳐다봤다. 알고보니 우리가 추워보였는지 들어가는 순서를 양보해준 것이었다. 아저씨는 꾸물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내 팔을 확 끌어 자기 앞에 나를 세웠고, 따뜻한 기내에 먼저 탈 수 있었다.


이 사소한 일로 내가 러시아에 빠져버린 이유를 오랜만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바로 루스끼들의 정다운 오지랖.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품고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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