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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Sep 08. 2022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하루의 기록

새벽에 ‘내가 세차장에서 잠들었나?’하는 생각을 하며 깼다. 빗소리가 하도 요란하고 창문이 흔들려서 자동 세차장 안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지대 낮은 곳은 또 잠기겠네…’ 중얼거리며 다시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와보니 창문이 빗방울들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그새 날이 개서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간밤에 내가 들은 그 요란한 빗소리의 흔적이 더 장렬해 보였다.

오늘은 나도 평소보다 좀 늦게 일어나서 바로 남편을 깨워 출근시키고 주부의 일을 시작했다. 수건 빨래를 하고, 이불과 베개를 털어 정리하고 잠옷을 걸어두고 깜빡한 프라이팬 설거지도 했다. 청소는 어제 해서 안 해도 될 것 같다.


주부 일을 끝내면 나는 백수가 된다.


백수는 더 바쁘다.

To do list를 쭉 적어보니 꽤 빼곡하다. 보통 자기 계발 일이 주 일인데, 이 자기 계발이 잘 되고 있는 건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백수의 가장 큰 문제점이자 어려움이다. 배우고 싶고 잘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왜 이리 물살을 거스르는 것처럼 버겁게 느껴지는지!


나는 아침형 인간이라 일찍 일어나 오전에 해야 할 일들을 대부분 해버리는 편이다. 오후에는 오롯한 나의 시간보다는 타인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시간들이 많아서 오전에 내 일을 다 해둬야 하루가 쫓기지 않고 뿌듯하다. 하지만 아침을 멍하니 보내버리면 하루 종일 멍하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멍해져 버리니 한 없이 멍해지는…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하며 오늘 해야 하는 것들을 모조리 꺼내 책상에 늘어 뜨려 놓았다. 그중 하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것을 하다 보면 텐션이 붙어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영어성경, 미얀마어 과외 책과 노트, 부동산 책, 노트북…


무엇을 들어도 한숨만 나오는 이 상황에서 나는 두 가지 갈래에 선다.


“오늘 안 하면 절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백수면서 뭘 그리 빡빡하게 굴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유를 갖자!” 하는 마음과


“이건 여유가 아니라 게으름이야. 남편이 열심히 일하는 시간 동안 난 집에 있는 건데, 시간 경영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이다.


일단 오늘은 첫 번째 마음이 이겼다.

 일들을 펼쳐  책상을 떠나 노트북을 들고 소파로  앉았다. 얼마  밀리의 서재에 가입해서 e-book으로 책을 보는데, 너무 좋다. 3 전에 미얀마  때는 한국  보고 싶으면 양곤 사무소까지  책을 빌리거나 제공받은 e-book 리더기로만 책을 읽을  있었는데,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서  취향의 책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냥 읽었었다. 궁하면 취향 따위는 사라진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앉아서 다운로드하면 책을 읽을 수 있다니, 너무 좋다. 물론 없는 책들도 많지만 그래도 이 정도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


아무튼 소파에 앉아 밀리의 서재에 들어가 읽고 싶어 저장해 둔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그냥 내가 읽고 싶은 책으로. 에라이~


그러다 아랫집에 사는 언니한테 카톡이 왔다.

“점심으로 같이 카레 먹을래요?”

사실 난 카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카레나 짜장처럼 밥에 부어 비벼 먹는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또한 궁하면 취향 따위 사라진다는 법칙이 적용됐다. 미얀마에 살면서부터는 카레를 먹는다. 그래서 언니의 카톡에 반갑게 꼬리 흔들며 답장했다.

“네! 제가 망고랑 망고스틴 가져갈게요~!”


책을 읽고 글을 좀 쓰다가 점심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있는 언니다. 언니와 이런저런 주부 이야기, 자녀계획 이야기, 결혼하고 달라진 친구관계, 해외생활, 남편 이야기를 했다. 정말 놀라운 주제들이다. 결혼하니 대화의 주제가 이렇게 180도 달라지는구나! 결혼한 지 6개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언니는 나의 투정 섞인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게 “지금 미얀마에서 제일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미얀마어도 열심히 하고 골프도 배우고 책도 읽고 글도 쓴다니, 대단하네!” 라며 응원의 말을 곁들여 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부끄러웠다.

나 너무 투정이 많은가…

나는 지금 내 상황에서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 나름 잘하고 있고, 꾸준히 하고 있다. 집안일과 요리, 언어 공부와 헬스, 그리고 골프 레슨도 시작했고, 틈틈이 책 읽고 브런치 글도 쓰고 있다. 그럼에도 요즘 텐션이 낮아지는 느낌이라 독서모임도 하나 신청했다.


돌아보니 나는 참 열심히, 잘 살고 있는데 왜 입만 열면 투정이고 부정적인 이야기뿐일까. 왜 자꾸 위로해주기보다 위로받고 싶어 하고 지지해주기보다 지지받고 싶어 하고 힘이 되어 주기보다 힘을 받고 싶어만 할까. 왜 내 삶의 가치와 열심을 타인의 기준에 의해 인정받고 싶어 할까.

나의 낮은 자존감과 잘못된 불안감의 표출의 실체를 직면하는 기분이었다.


언니네에서 후식으로 망고와 망고스틴까지 야무지게 까먹고 집으로 돌아와 zoom으로 미얀마어 과외를 했다. 주 4회 과외를 하는데, 2회는 우리 집에서 대면으로 하고 2회는 zoom으로 수업을 한다. 대면의 장점과 비대면의 장점을 모두 활용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수업을 마치고 퇴근한 남편과 정말 오랜만에 헬스장에 갔다. 원래는 남편 출근 전에 오전 운동을 하러 가는데, 코로나에 걸리고 계속 안 가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려서 오늘 아침에도 가지 못했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워밍업 차원으로 오후 운동을 갔다. 오랜만에 운동하려니 힘들기도 하고 에어컨에 문제가 있는지 너무 덥기도 하고, 코로나 후유증인지 체력도 너무 딸려서 40분 만에 나와 귀가했다.


남편은 바로 씻으러 들어가고, 나는 손만 냉큼 씻은 뒤 저녁을 준비했다. 다이어트를 하는 남편을 위해 저탄수 고단백 식단을 연구하고 있다. 오늘의 메뉴는 포두부 면으로 만든 알리오 올리오다. 번갯불에 콩 볶듯 후다닥 요리를 했다. 고작 한 달이지만, 그새 내 요리 실력은 꽤 늘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내일 남편 도시락을 쌌다. 남편 도시락 메뉴는 볶은 포두부면과 계란, 양배추와 오이를 넣어 말은 김밥이다.(밥은 안 들어갔지만) 도시락통에 김밥을 가지런히 썰어 넣고 토마토 한 개와 호두 세 알, 유산균과 비타민을 하나씩 넣어주면 완성이다.



씻고 나와 오전에 미룬 미얀마어 공부를 했다. 내일은 대면 수업을 하는 날이고, 시험을 보는 날이라 공부를 더 미룰 수 없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오늘 하루도 참 알찼다. 오늘 직면한 나의 연약한 모습을 내일은 좀 더 돌아보고 어떻게 승화하고 표출시키는 것이 좋을지, 나는 무엇에 집착하며 무엇에 쫓기며 살고 있는 건지 좀 더 살펴보아야겠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하루들이 가치 있게 쌓여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하고, 견고해져서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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