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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Dec 14. 2022

[구인]친구를 구합니다

아침시장에서 만난 꽃 파는 아이

어제저녁에는 문득,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성격이 모난 건지 솔직하지 못한 건지, 해외 살이를 하며 친구들이 보고 싶었던 적도 부모님이 보고 싶었던 적도 딱히 없었는데, 어제는 뭔가 눈물이 쪼꼼 나올 정도로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내게는 다행히 다정하고 속 깊은 남편이 있어서 진지하고 깊은 대화는 매일 하고 있지만, 그냥 친구들과 별거 아닌 일로 낄낄 거리며 누가 날 어찌 생각할까 신경 쓰지 않는 가볍고 미지근 한 시간들이 그리워졌다.

갑자기 감성에 차올라서 '친구들아 보고 싶어ㅠㅜ'하고 카톡을 잔뜩 보냈는데, 시간을 보니 한국 시간으로 새벽 1시 반이었다... 이런... 대부분이 직장인이라 역시나 답장은 거의 없었고 ㅋㅋㅋ 미얀마 시간 5시 반쯤 진동이 울려서 잠에서 깼다. 휴대폰을 보니 카톡이 잔뜩 와 있었다.


가벼운 근황 토크들을 하며 해 뜨는 쪽 창문 앞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몇 달 전에는 이쪽에서 해가 떴던 것 같은데, 좀 더 오른쪽에서 해가 떠서 좀 지난 다음에야 오리알 노른자같이 주황빛의 동그란 해를 봤다. 창문을 열어두고 앉아 있으니 아침 공기가 살짝 서늘한 게 마음에 들어서 나갈 궁리를 했다. '그래 고구마를 사러 가자!(?)'며 벌떡 일어나 모자를 챙겨 쓰고 집 밖을 나섰다. 사실은 밖에 나가 누구한테라도 말을 좀 걸어볼 요량이었다. 그냥 솜털같이 가벼운 대화가 좀 하고 싶었다. 미얀마는 아침을 사 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아침부터 동네 가게들이 북적인다. 가게가 아닌 곳도 아침에만 잠깐 국수를 팔기도 한다.

러펫예(미얀마 밀크티) 한 잔 시켜 주위 사람들한테 슬쩍 말이나 걸어볼까 했는데(남편이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발상이다 ㅋㅋㅋ) 너무 아저씨들뿐이라 좀 그랬다. 아줌마들도 몇 분 계셨지만 다들 남편 같아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어딘가 화가 나 보였다...


어슬렁 어슬렁 누가 봐도 동네 한량처럼 시장 길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꽃 파는 아이를 만났다. 나는 아이들에게 좀 마음이 약한 편이라 이 아이가 꽃 좀 사달라고 하면 500짯 어치라도 꼭 사주곤 했다. 이제 이 아이도 내가 본인에게 마음이 약한 걸 아는 건지, 매번 마주치면 절대 지나치지 않고 내게 꽃을 사라고 권한다. 한 달 전쯤 인가에는 애가 한참을 안 보이다가 나왔길래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니 할머니가 다리를 다치셔서 병원에 다녀왔단다. 할머니 간호를 하다가 돈이 없어서 다시 꽃을 팔러 나왔다고. 딱한 마음에 과일 가게에서 귤을 좀 사서 할머니랑 먹으라고 들려 보낸 적이 있다.  


그때 생각도 나고, 오늘은 말 걸어주는 사람이 반가운 날이라 할머니는 어떠시냐 물어보니 아직 좀 상처가 남았다고 한다. 오늘도 꽃을 500짯 어치 사고 다시 어슬렁어슬렁 시장을 돌아다녔다. 우리 동네는 아침 시장이랑 저녁 시장이 다른 골목에서 서는데, 날씨가 좋아서 아침 시장을 두 바퀴 놀고 저녁 시장 쪽 골목도 한 바퀴 돌아가 다시 아침 시장 쪽으로 왔다.

흰색 꽃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듯한 신기하고 귀여운 꽃이 보여서 꽃을 찍고 있을 때 그 꽃 파는 아이가 내게 오더니 저쪽에 주황색 꽃이 있다고 알려줬다. 귀여운 마음에 고맙다고 말하고 아침 먹었냐 물어보니 안 먹었단다. 할머니가 점심부터 요리를 하셔서 아침은 못 먹는다고. 통통한 편의 아이였는데, 잘 먹어서 살이 찐 게 아니라 제대로 끼니를 못 챙기고 칼로리 높은 간식으로 불규칙하게 배를 채우면서 살이 찐 것 같아 보였다.


'그럼 나랑 같이 아침 먹을래? 내가 사줄게.' 하니 망설이다가 알았단다. 시장 끝에 있는 오노카욱쉐(코코넛밀크국수) 파는 노상에 가 앉았다. 주인아줌마가 사시셨다. 그걸 왜 언급하냐면, 그분이 나한테 말씀하시는데 내 뒤에 있는 사람한테 말씀하시는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가 '미얀마어 못 알아듣네'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못 알아들을 수도 있지! 나는 외국인인걸? 하지만 결국 나를 향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시는 줄 알았어요'하니 하하 웃으시며 영어를 못하셔서 미얀마어로 말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 받고 ㅋㅋㅋ 노상에 앉아 국수를 기다렸다.


예전엔 미얀마 친구 따라 몇 번 이런 곳에 앉아 국수를 먹곤 했었는데, 이번에 양곤에 오고는 경험이 없다. 그때는 내가 더 어려서 모험심이 강했는지, 아니면 양곤 보다 내가 살던 지역이 더 깨끗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노상에서 뭔가를 먹는 게 두렵다. 몸에 안 좋을 것 같고, 배탈 날까 봐. 근데 오늘은 그냥 오랜만에 좀 이러고 싶었다. 미얀마 사람들처럼, 미얀마식 아침을 미얀마 길거리에서 퍼져 앉아 후루룩 먹으며 미얀마를 엉덩이와 목구멍으로 느끼고 싶었달까.



꽃 파는 아이 한 그릇 나 한 그릇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국수 양이 워낙 적어서 다 먹는데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아 이야기를 많이 나눌 시간은 없었다. 형제가 있냐고 물으니 아무도 없고 할머니랑 단둘이 산다고 한다. 그것도 놀라운데 자기 혼자 벌어서 할머니랑 먹고살고 있단다. 이런...


나 살기 바빠 잊고 있었던 미얀마와의 첫 만남이 생각났다. 가난하고 어린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머리를 싸매던 나였는데, 뭐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는 거겠지만 너무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외면에 더 가깝다.

요즘 여러 가지 현실의 문제들로 머리가 참 아프다. 나는 이 나라에 왜 다시 왔을까,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살길 바라실까, 계속 고민하고 기도하고 있다. 우린 미얀마에 얼마나 더 살게 될까. 이 애증의 땅, 미얀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좋을 땐 가장 쉽게 잊히고 힘들 땐 가장 먼저 사치로 여겨져 외면하게 되는 이 아이러니함.


아무튼 한국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괜스레 외로워서 아침 댓바람부터 청승을 떨어댔는데 선뜻 친구가 되어준 꽃 파는 아이가 고맙다. 내가 좋아하는 오노카욱쉐를 같이 먹어줘서 고맙다. 아주 달콤하고 고소한 게 배탈 걱정 사라지는 맛이었다. 위생에 대해서는 살짝 흐린 눈을 하면 뭐든 괜찮다. 친구를 얻고 싶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다행히 이제 미얀마에서 산 짬이 꽤 됐는지 웬만하면 배탈은 안 난다.


가끔 너무 일찍 일어나서 혼자 산책 나가고 싶은 날엔 주머니에 꽃값 500짯과 국수 두 그릇 값 1400짯을 챙겨서 이 친구에게 같이 아침 먹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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