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mini flowers❀ 열여섯 번째 이야기
뭘 하고 사는 건지 이래저래 참 바쁘다. 아이들에게 대부분의 삶은 새롭고 흥미로워서 많은 시간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만 어른들은 이제 웬만하면 익숙하고 예상가능한 삶을 살게 되기에 점점 기억하는 양이 줄어들면서 시간이 빨리 지났다 느낀다고 하던데, 나도 어쩜 어른인가 보다.
아이들과 바람개비 만들던 날이 며칠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이 흘러 있었다.
이제 날씨가 꽤 시원하다. 물론 한국인 기준의 시원함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동남아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할만하다. 오늘은 목걸이를 10개 들고나갔다. 우리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레단으로 향했다. 여름엔 레단을 조금만 걸어도 땀에 흠뻑 젖고 여기저기에서 습하고 썩은 냄새가 나서 최대한 숨을 짧게 쉬었어야 했었는데, 이젠 조금은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숨을 길게 쉴 수 있다. ㅋㅋㅋ 결코 완전히 산뜻하진 않다.
나와 E가 길의 끝과 끝에서 서로를 향해 가며 아이들이 어디 있나 살폈다. E가 아이들을 찾았다며 내게 그쪽으로 오라고 했다. 세 명이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냐고 찾았다고 했다. 누가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웅(가명)이 있었다! 아웅은 나를 보자마자 내 이름을 외치며 반겨줬다. 오~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생각해 보니 마지막 레단에 온 게 두 달도 전이다.
아이들이 있었던 곳은 한 카페의 야외석 공간이었다. 테이블도 있었고 인도와도 구분되어 있어서 붐비지도 않고 깨끗했다. 그곳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여기서 계속 있어도 되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주인이 화내지 않을까? 물으니 괜찮단다. 그래, 얘네가 전문가겠지 싶어서 자리를 잡았다. (혹시 누가 뭐라고 하면 음료 주문해 먹어야겠다 하며)
가져온 목걸이 만들기 세트를 보여주자 엄청나게 관심을 보였다. 남자아이 세 명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여자 아이 한 명이 더 합류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를 더 가져와 네 명이 앉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
작은 나무 조각에 그림을 그리고 줄에 구슬들과 함께 꿰어서 목걸이를 만드는 세트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흥미로워했지만 “그릴 줄 몰라요”를 계속해서 외쳤다.
그래서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부터 생각해 보자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하나씩 말하기로!
두 명은 용을 그리고 싶다고 하고, 한 명은 예시로 그려져 있는 그림을 따라서 그리고 싶다고 했다. 여자 아이는 벌써 그리기 시작했다.
용을 그리고 싶은데 그리기 어렵다고 계속 그려달라고 하는 아이들에게는 볼펜으로 스케치를 해줬다. 색칠과 나머지 꾸미기는 너희의 몫이야! 하면서.
여자 아이는 여동생을 안고 있었다. 아이는 7살이었고, 동생은 7개월이라고 했다. 정말 예쁘고 야무지게 생긴 아이였다.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척척 색을 찾아 나비도 그리고 집도 그렸다.
동생이 자꾸 목걸이를 만지고 방해했지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제일 먼저 만들기를 마쳤다.
두 명의 아이가 새로 왔다. 너희도 할래? 하고 물으니 작은 아이는 누가 봐도 관심 있고 궁금한 개구진 얼굴로 우릴 바라봤고 큰 아이는 망설였다. 안 하겠다고 하더니 하고 있는 아이 옆에 와서 계속 참견을 하길래 다시 한번 하라고 새것을 꺼내 보여주며 이야기하니 쑥스러워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쑥스러워하던 것이 무색하게 무척 열심히 즐겁게 목걸이를 만들었다.
전화가 와서 잠시 길가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이삭 묶음이 놓인 광주리를 머리 위에 지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낯익은 아이다. 3개월 전에 만났던 너무 작아서 세 살 정도 되었을까 싶었는데 6살이었고, 3살부터 이삭을 팔고 다녔다는 아이였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도 나를 기억하는 눈치였다. 통화 중이어서 말을 건넬 수 없었지만 눈으로 안쪽으로 가라고 말했다. 아이는 내 눈빛을 알아듣고 안으로 들어갔다. E는 아이를 보고 반기며 목걸이 만들기 해볼래 물었다. 표정이 없고 뭔갈 물어도 거의 반응이 없던 아이 었던지라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바로 광주리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무엇을 그리고 싶냐고 하니 호랑이를 그리고 싶다고 해서 펜으로 호랑이를 그려줬다. 색칠을 네가 하라고 색연필과 사인펜을 보여주니 옆에서 형아들이 주황색 사인펜을 쥐어줬다. 의외로 아이는 펜을 매우 잘 잡았다. 연필을 잡듯 사인펜을 잡고 집중했다.
중간중간 어떤 색 줄까? 맘에 들어? 물으며 아이와 눈을 마주쳤는데, 아이는 어색하지만 확실하게 웃었다. 가슴 아픈 것은, 웃을 줄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진짜 같다는 거였다. 태어나서 활짝 웃어본 적 없는 아이 같았다. 웃으면 혼이라도 났었던 건지, 미소를 짓다가도 금세 멍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고장 난 것처럼, 무척 어색했다. 그래도 이 아이가 우리를 보고 어색하게나마 미소 짓는다는 것이 기뻤다.
아이는 끝까지 집중했다. 뒷면까지도 색깔을 스스로 골라가며 얼마나 열심히 칠하던지, 윗입술이 병아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칠하기를 멈추면 다 칠했어? 물었는데, 세 번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다른 색을 골라 집었다. 지금 즐기고 있구나! 싶었다.
1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아주 작은 아기를 안고 이삭 묶음이 있는 광주리를 이고 지나가다 우리를 보았다. 색칠하고 있는 아이와 한 무리 같았다. 다가와서 아이에게 "너 여기 있었네"하길래 "너도 할래?" 물으니 아주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아니요"라고 했다. 이들이 같은 앵벌이 그룹에 속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거절을 하고 잠시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와 계속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새것이 있으니 하고 가도 된다고 했지만 아이는 누군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조용히 다가오더니 집에 가서 하고 싶다고 하나만 줄 수 있냐고 물었다.
현장에서 하지 않고 줘버리면 다른 아이들도 집에 누가 있다, 저기에 친구가 있다 하면서 나도 달라 외치고, 팔아먹거나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는 주지 않는 것이 나름의 원칙이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몰래 하나 쥐어 주었다. 정말 하고 싶어 보였고, 집에 색칠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밝게 웃으며 정말 소중히 품 속에 숨겨 가지고 갔다.
이렇게 총 8명의 아이들이 나만의 나무 목걸이를 만들어 갔다. 모두 무척 기뻐했고 소중히 여겼다.
아이들이 오고 가고 하는 동안 아웅과 친구 한 명은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다. 마무리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자 오늘 책은 안 읽어주냐고 했다. 역시 너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너를 위해 우리가 새 책을 샀지!
새로운 책을 꺼내 보여주자 아웅은 "이거뿐이에요?" 했다. ㅋㅋㅋ 더 많이 사 오라고 우리에게 압박 아닌 압박을 하며, 책을 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책을 읽어주는 모양새가 됐다. E가 마지막 목걸이 만드는 아이의 마무리를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연습을 안 한 책이었어서 긴장했다.
최대한 유창한 척,... 더듬더듬 책을 읽으며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계속해서 "알아들어?" 물었는데 알아듣는다고 했다. 진짜?! 아무튼 최선을 다 해 읽어주었다. 아웅은 책 내용에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내가 문장의 절반쯤 읽는 시점에 본인의 상상으로 문장을 마무리하며 책 읽기에 동참했다. 어떤 때는 읽을 줄 아는 건가 싶어서 물어보니 읽을 줄은 모른다고 했다.
아웅은 책을 좋아하고 글을 읽고 싶어 하고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글자를 가르쳐주면 배울 마음이 있냐고 물었다. 아웅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재차 확인을 하는데도 아웅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럼 우리가 글자를 가르쳐줄게. 네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책을 한 권 선물해 줄게. 어때?"
아웅의 대답이 정말 대단했다.
"가르쳐 주러 언제 올 거예요? 날짜를 정해요. 저는 월요일이 좋아요."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오라고 약속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닌가! ㅋㅋ
"월요일 말고 다른 날은 안 돼? 다른 날에 너 일해야 하니?"
"그건 아닌데, 월요일에 하면 좋겠어요. 몇 시에 올 거예요?"
이렇게 진심이라니?
그렇게 다음 주 월요일 네 시 반, 오늘 만났던 이 가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옆에 있던 두 명의 아이들도 덩달아 자기도 글을 배우고 싶다며 같이 하겠다고 했다.
"진짜?" 여러 번 물었다. 아이들은 진짜라고, 진심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갑자기 아이들의 요청에 의해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 아직 시작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요청을 받았음에 기뻤다. 글과 숫자라도 읽고 쓸 수 있다면 조금은 더 나은 삶의 기회가 생길 테니 말이다.
E와 함께 서점에 갔다. 새 학기 시즌이 끝나서 그런지 교제가 없어서 세 번째 가게에서 겨우 찾았다. 연필도 샀다. 정말 아이들이 월요일 네 시 반에 그곳에 나타날지는 미지수지만, 우리는 준비를 해서 갈 것이다. 설렌다. 정말 언젠가 아웅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책 선물을 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벅차고 기쁠까.
조금씩 아이들과 관계가 쌓여감이 느껴진다. 아이들의 미소를 보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민 손을 잡아 다음을 약속한다. 우리에겐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이어도 아이들에게는 오래 머무르는 시간일 테니 조금 더 자주 찾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