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다리는 시간(L'attente)
기다림이란 힘든 일이다. 내내 마음 졸이며 희망과 절망 사이를 급격히 오간다.
하지만 기다림은 종종 기쁨이 되기도 한다. 기다리던 그것이 내게 온다는 확실함이 있다면 아마 설렘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토요일에 당신을 만나기로 했다면 나는 수요일부터 이미 행복감에 흠뻑 젖고 말테니. 그런데 기다리던 누군가가 다시는 내게 올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나는 기다리는 것을 멈추게 될까.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러닝 타임 내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나요? 기다리기는 할 건가요? 안나(줄리엣 비노쉬)는 아들 주세페가 자신을 떠난 바로 그 날부터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아들의 부재가 명백해진 그 순간부터 그를 기다리는 엄마. 이 영화가 모성애를 통해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안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텅 빈 대저택에서 아들을 기다린다. 사실 이 모든 말들은 은유적이다. 주세페는 단순히 가출을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나의 기다림은 부질없다. 죽은 아들을 기다린다니?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망령이 되어서라도 돌아오길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 모든 빛을 차단하는 검고 두꺼운 커튼을 온 집안에 쳐 놓고서 안나는 깊은 적막에 빠진다. 마지막 한 점 빛까지 모두 사라져 버리는 영화의 한 장면은 안나의 어두운 가슴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는 아직 아들이 살아있다고 상상하는 안나를 비추면서 끝없는 죽음의 이미지로 화면을 채운다. 검은 집, 검은 옷, 고요, 슬픔. 마치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이.
그리고 어느 날, 주세페의 여자 친구 잔(루 드 라주)이 안나의 집을 찾아온다. 주세페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잔은 주세페에게 이런저런 투정 섞인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고 대저택 근처 호수에서 조용히 헤엄치며 시간을 보내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안나는 그런 잔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한 대상을 함께 기다리기 시작한다. 둘의 기다림이 헛된 희망으로 끝날 것이란 걸 알기에, 이 영화는 더욱 가슴 저민다.
잔은 호숫가에서 만난 두 청년들을 저택으로 초대하고 안나는 그들을 위해 파스타를 만든다. 짙은 초콜릿 색깔의 파스타 반죽을 주무르는 안나의 손이 오랫동안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들 또래 남자들을 보며, 아들을 떠올렸으리라. 그들과 서슴없이 어울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흩뿌리는 잔 또한 남자 친구를 떠올렸을 테고. 두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안나가 아들을 잃었고 잔이 애인을 잃었음을 상기시켜준다. 레너드 코엔(Leonard Cohen)의 <Waiting For The Miracle>에 맞춰 춤추는 잔의 몸짓은 아름답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생기발랄한 여자. 하지만 그녀의 사랑을 받아야 할 주세페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 안나는 깨달은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기다리는 건 '기적'이라는 것을. 기적은 쉬이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고, 잔 역시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주세페가 오지 않는 저택은 잔에게 더 이상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곳이 돼버렸다. 잔에게 주세페는 어딘가 살아있을, 곧 돌아올 존재였고 안나는 그런 잔과 함께 아들을 기다리며 줄곧 자신을 속여왔다. 아들을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안나에게 아들은 살아있었다. 두 여자는 함께 할 수 없었을까. 나는 외로운 두 사람이 주세페의 빈자리를 채우며 함께 하길 내심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결말은 무엇도 남기지 못한다. 잔은 안나의 집을 떠나고 안나는 다시 혼자 남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부활절에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에 마지막 희망을 건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가 살아 돌아왔던 그 부활절에. 이 세상 모든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강한 믿음을 갖고서.
하지만 부활절에 살아 돌아오는 이는 예수이며 안나의 아들이 아니다.
안나는 멍한 눈으로, 갈망하는 마음으로 부활절 행렬을 뒤따른다. 사람들 틈에서 언뜻 아들의 모습이 스친 듯도 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다시는 그 손을 잡아볼 수 없다는 것. 죽음은 이 모든 과제를 우리에게 턱 하니 던져놓고 그것에 차차 익숙해지라 말한다. 그녀는 언제쯤 아들과 이별할 수 있을까?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결코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절망이 되더라도. 아들에 대한 기억이 차츰 빛이 바래 희미해지더라도.
죽음의 빈자리는 언젠가 삶으로 채워진다.
안나의 이야기는 저쯤에서 멈추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조금씩 삶으로 돌아올 것이다. 영화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안나의 고독을 담고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고독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타국인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프랑스 여자, 그녀를 찾아오는 또 다른 프랑스 여자. 둘은 이탈리아에서 단 둘이 프랑스어로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 우연히 그 집에 초대된 두 남자. 그들은 여행지에 잠깐 들린 이방일인 뿐이다. 집을 관리하는 피에트로 역시 이 집의 주인이 아니며 곁가지를 맴돈다. 시칠리아 대저택을 드나들던 저 다섯 이방인들은 잠시 만났다가 다시 흩어질 운명 속에 있다.
그 운명은 비단 저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온 이방인인 우리들은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기다림은 나를, 그리고 당신을 살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