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워나로위츠(David Wojnarowicz)
어릴 적 기억은 매번 다른 버전으로 내 머릿속에서 상영된다. 그게 진짜 내 기억인지 기억을 가장한 허구인지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이 각각 한 편씩 갖게 되는 오리지널 버전 DVD 같은 것이니까. 사진은 과거를 정확히 담고 있을까? 일상 속 찰나를 포착한 사진들로 빼곡한 앨범을 들춰본다. 하지만 사진을 완벽한 기록자라고 보기도 어렵다. 사진과 사진 사이의 공백은 또다시 나의 빈약한 기억력에 의지해야만 한다. 몇십 년 만에 찾은 초등학교는 기억 속 모습과 너무 달랐다. 운동장은 작았고 깊고 무서워 보였던 연못은 놀라울 만큼 얕았다. 뒤뜰의 소나무 숲은 숲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정말 작았었구나. 시간은 언제나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구나. 아쉬움과 함께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구나. 더 이상 그때의 작고 연약한 소녀가 아니구나.
어른이 된 뒤 어린 시절의 장소로 되돌아 갈 때 우리는 원하던 원치 않던 무언가를 확인받게 된다.
그 시절 나는 어리고 보잘것없었으며 허무맹랑한 꿈을 꾸던 아이였음을. 지금 나는 나름대로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 어른이 되었음을. 시간이 흘렀음을. 어릴 때 살던 동네를 다시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고 느꼈을 때 나는 여러 가지 고민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지, 잘 가고 있긴 한 건지. 스물 중반, 아직 시린 바람으로 싸늘했던 그 해 겨울 끝자락에 나는 다 큰 몸으로 과거의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힘을 얻어 돌아왔다. 나는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얻었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David Wojnarowicz, 1954-1992)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미국 출신 사진작가 워나로위츠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돌아가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그곳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장소가 아니었다. 워나로위츠에게 유년기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온 몸 곳곳에 잊지 못할 상흔을 남긴 지옥 같은 시절을 뜻했다.
워나로위츠는 불행한 아이였다. 부모는 그가 두 살 때 이혼했고 이후 아버지 손에 자란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선원이었다. 자식들을 노리개처럼 부려먹고 때리고 학대하기 일쑤였다. 워나로위츠는 힘으로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존재에게 학대받으며 무력감과 절망감을 일찍 깨우친다. 그는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이 난무하는 집에서 무엇으로도 보호받지 못한 채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할 감옥이 된다는 건 누구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리라.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워나로위츠는 거리를 전전한다. 깡마르고 더러운 몸을 팔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몸을 탐했던 남자들은 모두 덩치가 컸고 그를 폭력적으로 다루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도달한 곳이 아버지를 닮은 이들이 득실거리는 거리였던 셈이다. 열다섯 살, 몸을 팔고 받은 돈은 10달러였다.
나는 워나로위츠를 떠올릴 때마다 인생의 잔혹한 굴레에 할 말을 잃는다.
그는 왜 자신을 그런 곳으로 내몰았던 걸까?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타인과 접촉하며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달랬다고 워나로위츠는 고백한다. 시간이 흘러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을 때 그는 친구에게 빌린 카메라를 들고 노숙 생활을 했던 뉴욕 거리를 다시 찾는다. 1979년 여름의 일이었다. 사진 속에는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언제나 혼자인 가면 쓴 남자는 워나로위츠가 영양실조에 걸린 몸으로 기대어 있던 더러운 벽에 똑같이 몸을 기대고 서 있거나, 지하철에서 모르는 이들 틈에 앉아 있거나 난잡한 낙서가 그려진 벽을 배경으로 쓸쓸하게 서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워나로위츠의 친구들로 그들은 돌아가면서 랭보 가면을 쓰고 카메라 앞에 섰다.
19세기 파리에 불시착한 천재 시인 랭보는 타고난 재능을 멋대로 소모했고 자기를 파괴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워나로위츠는 어린 노숙자였던 자신의 모습에 랭보를 대입함으로써 그 시절의 일들을 정당화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을 학대하며 제멋대로 내버려두었던 과거가 지금의 사진 작업을 가능케 하는 연료가 되었다는 선언.
그는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 연작>을 통해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확인하려는 그의 행동은 또 다른 두 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그때의 모습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외롭다.
가면은 우리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감춰준다.
가면 뒤의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폄하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워나로위츠는 십 대 시절, 거리에서 몸을 팔기 위해 자신을 전시했던 그 기억에서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다. 익명의 존재가 보내는 욕망의 눈빛, 판단의 눈빛에 어떠한 방어선도 없이 자기를 내몰아야 했던 과거의 기억은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 랭보 가면 뒤에 얼굴을 감춘 채 자신에게 상처 주었던 장소를 다시 찾는 행위에는 워나로위츠의 간절한 마음이 투영돼 있다. 그 시간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소망, 이제는 정말 괜찮을 수 있다는 희망. 그가 수많은 예술 중 사진을 선택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카메라는 렌즈 속에 피사체를 담는다. 카메라는 주체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워나로위츠는 보아지는 대상이 아닌 보는 존재가 되고 싶었으리라.
그는 서른여덟에 에이즈로 사망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도 없이 상처 받는다. 다른 이들에게 차마 고백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 짐들을 어깨에 짊어지고도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다 한 번씩 멈추어 설 때가 있다. 더 이상 나아가기 힘들 때가 찾아온다.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자신만을 위한 의식이라면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나는 또 언제쯤 과거의 공간을 찾게 될까.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을 돌아보게 될 만큼 멀리 나아간 뒤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보다 빠른 시일 내에 치유의 시간이 또 한번(어쩌면 여러번) 필요하리라는 사실을. 삶은 언제나 그래왔다는 사실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