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대학 1학년 때 살았던 기숙사는 명동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건물로 엄숙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였다. 당연히 외박은 자유롭지 않았고 통금 시간도 엄격했다. 당시 나는 늘 많이 잤다. 아침 수업이 없는 날이면 오전이 다 지난 시간에야 느지막이 일어나 움직였다. 기숙사생들은 소수였고 다들 개성이 독특한 타입이었다. 너무 예민해 남들이 다 잠든 시간에 활동하는 사람, 반대로 너무 둔감해 밤낮 가리지 않고 드라이기를 돌린다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 대부분은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내는 편이었다. 나 역시 그리 튀지 않게 생활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여대생 기숙사와 사뭇 다른 환경인 건 확실했다. 청춘의 패기 넘치는 일탈을 감행하기에 적합한 기숙사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룸메이트가 아침 일찍 학교로 나간 줄도 모르고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날은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아무도 깨우는 사람 없이 그렇게 자본 건 처음이었다. 기숙사는 한차례 태풍이 일어나고 난 뒤의 들판처럼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창문으로 비쳐 드는 햇살 속에 작은 먼지들이 느릿느릿 떠다니고 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침대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낯선 장소에 있다는 느낌이 약간 차가운 공기를 타고 콧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손으로 이불을 가만히 쥐었다 놓았다. 기숙사에 들어오며 새로 구입한 연두색과 녹색의 체크무늬 이불은 좀처럼 포근해지지 않았다. 침대를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이불을 탁탁 털었다. 아까보다 많은 먼지들이 햇살에 비쳐 보였다. 왠지 세상 속에 나만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세상이 나만 빼고도 잘 돌아가는 기분이었을까.
추리닝을 입고 명동 거리로 나섰다. 그 무렵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평일이어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일 뿐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화장품 가게를 기웃거리고, 길거리에 파는 인형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처음 보는 골목에 다다랐는데, 스카프를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스카프를 살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괜스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빙빙 돌며 스카프를 이리저리 들춰봤다. 옅은 분홍색에 하얀 꽃이 조그맣게 흩어져 있는 스카프, 보라색 바탕에 노란 나비가 그려진 스카프. 내가 하고 다닐 만한 것들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 나를 한참 보다 못한 주인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 이거 살 거예요? 아뇨. 그냥 구경하는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저씨가 큰 소리로 덧붙였다. 아가씨, 여기 사람 아니네? 순간 당황한 나는 네, 그런데요. 하고서 휙 돌아섰다. 왜 당황했을까? 아저씨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기숙사로 돌아오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별 뜻 없는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회심의 펀치를 맞은 듯 비틀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감정은 소외감에 가깝다. 너는 다른 곳에서 온 모르는 아이야.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후 나는 종종 나를 숨겼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굳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지 않았다. 정체성을 감추기. 그와 동시에 나타난 또 다른 경향은 나의 정체성을 숨기기 싫다는 오기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나는 굉장히 양면적인 사람이었던 셈이다. 나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가 나라는 사람을 굳건히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 어쨌든 이 모든 행동은 외로워지기 싫어서 선택한 일이었다.
그 날, 무언가 들킨 듯 부끄러운 마음으로 기숙사로 걸어갔던 스무 살의 내가 떠오른다.
그땐 왜 그랬을까. 이 곳에 얼른 뿌리내려야 한다는 조급함이 아직 미성숙한 여자 아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지만. 얼른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오후 세 시에 시작하는 수업이 하나 있는 날. 같이 저녁을 먹자는 친구의 문자가 와 있었다. 세상은 나 빼고도 잘만 돌아갈 것이었지만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뜨거운 물로 몸을 씻으며 조금 전의 당혹감을 깨끗이 흘려보내려 했다. 그 날 저녁 친구와 무얼 먹으며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기숙사로 돌아갔던 그 날. 대낮의 활기찬 명동은 파장하는 상인들로 어수선했다. 아까 내게 급작스런 질문을 던졌던 아저씨는 이미 거리를 떠나고 없었다. 다시 내일이 되면 이 곳은 생기로 넘쳐나겠지. 지독히 혼자 같았던 날도 가느다란 꽁무니만을 남기고 깊은 고개를 넘는 중이었다. 내일이 되면 나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