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나의 기운이 머무는 나의 공간들에는 단 한 번도 물건이 쌓여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은 '소비'로 점철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마치 하이에나처럼 소비할 것들을 찾아다녔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들, 문구류, 목숨도 바칠 수 있을 만큼 사랑했던 내 가수들의 MD들, 커피 전문점 MD 상품과 풀지도 않는 문제집을 사모으는 것에 미쳐있었다. 돈이 생기는 족족 매 순간 그맘때 관심을 가졌던 물건들에 용돈을 쏟아부었다. 의외로 공간 구분이나 정리에도 관심과 소질이 있었긴 했지만 면적에 비해 물건의 개수가 터무니없이 많으면 작고 소소한 나의 정리력이 쓸모없어지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결국 방바닥에는 물건들이 넘쳐흐를 듯이 쌓여 있었고 서랍은 물건들을 뱉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소비, 생활방식을 고수하던 내가 어느 날 우연히 SNS에서 추천된 한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무려 방안에 커다란 테이블과 책꽂이, 침구만 덩그러니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마주한 순간 뭐랄까...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모든 공간에 근심을 쌓아놓고 사는 나와는 달리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가득한,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올려져있지 않은 그런 여백이 정말 부러웠다. 학창 시절 우리 집 거실을 마주했을 때와 이 사진을 마주했을 때, 두 번의 작은 경험이 모여 내가 미니멀라이프를 꼭 실천하겠노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즉시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할 수는 없었다. 일상에 치인채로 비우기를 시도할 때마다 너무나도 많은 내 짐들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어디부터 어디까지 비워야 하는지,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조차 가를 엄두가 안 났고, 그 기준을 세울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꽤나 흘러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고 엄청난 패배감과 무기력에 잠식되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의 나에게는 일상의 변화가 간절했고 이 무기력의 고리를 끊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만들어줄 단 하나의 씨앗이 필요했다. 부정적인 기운이 잠식해버린 현실을 벗어나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어지럽혀진 공간이 어지러운 나의 머릿속을 더더욱 어지럽게 만들었고 어지러움의 블랙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공간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나는 물건 비우기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