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자MAY Nov 06. 2017

"하지만 나는 배낭여행자잖아?"

세계일주 D+11|베트남 호이안



베트남에는 싸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참 많다. 그런데 대부분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이다. 예를 들면 천가방, 동전 지갑, 작은 인형 따위 말이다. 나 역시 그런 아기자기한 –그러나 크게 쓸모는 없어, 책상의 전시품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서랍으로 사라질- 것들을 보면, ‘어맛! 귀여워! 이건 사야 해!’를 외치던 부류다. 그런 '아가’들을 두고 발걸음을 옮기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날도 길거리에 즐비한 상점에 놓인 천 파우치와 달랑이는 인형에 발이 묶여 가만히 들었다 놨다만 반복했다. 참고로 나는 이미 옷, 기기, 생리용품 등 각 종류에 맞춰진 파우치를 충분히 챙겨 왔다. 인형은 뭐, 말할 필요도 없다. 사야 할 명분을 만들고자 ‘이것들이 없으면 안 될 이유’를 떠올려봐도, 아무래도 마땅한 용도가 없다. 


이때 모든 상황을 역전시킬 만능 질문이 날아온다. 

“그렇지만 귀엽잖아…?”


이 질문의 파급력은 엄청나다. 1년 반의 회사 생활 동안 점점 더 귀여운 것으로 마우스 받침대를 몇 번이나 갈아치웠는지 모른다. 심지어 손목 보호를 위한 기능성 받침대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게 다 "그렇지만 귀엽잖아?" 그 자식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번 여행에서는 이 만능 질문에 맞먹는 대응수가 존재한다. 

이름하여,

“하지만 나는 배낭여행자잖아…?”


이 질문이 던져지면 나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산다면 귀여움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신 약 0.4g의 배낭 무게가 증가된다. 자, 과연 이것이 0.4g의 가치가 있는가? 참고로 나는 여행 2주 차, 난생 처음 메보는 무거운 배낭이 아직 적응되지 않았다. 이미 무게는 한계치. 배낭으로 인한 피로감은 그대로 나의 여행에 차질을 준다. 자, 그러니까 이게 내 여행에 0.4g의 피로도를 높일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 이냔 말이다. 그것도 남은 긴 일정 내내.


이쯤 되면 ‘지름신 세포’는 KO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배낭여행자잖아…?”


이 질문은 남은 나의 여행에서 두고두고 큰 활약을 했다. 

지름신을 자제시켜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드는 만능 질문.


칼바람이 부는 산에서 따뜻한 산장을 옆에 두고 야외에 주섬주섬 텐트를 펼칠 때에도,

돈이 다 떨어져 밥 한 끼를 굶어야 할 때에도,

진흙에 뒹굴어 옷이 완전히 더럽혀져도,

‘괜찮아’라고 깔깔- 웃어넘길 수 있던 것은 다 저 질문 덕분이다.


일상을 살던 내가 어느 아침 출근길, 옷에 커피를 흘렸다면?

아침부터 얼굴을 찌푸리고, 하루 종일 그 얼룩이 거슬렸을 터.


어쩌면 그것은 ‘질문’보다는 ‘주문’에 가까울 수 있겠다.

마인드 컨트롤을 위한 ‘마법의 주문’ 말이다.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는 것으로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어쨌든 그 주문 덕에 나는 허투루 나갈 뻔한 꽤나 많은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채울 것과 비워낼 것.

남길 것과 흘려보낼 것.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길 찾기'만큼이나 내가 가장 못하는 일 중 하나다. 

내 방 서랍에는 아직도 14년 전 미스터 케이 잡지와 초등학교 때 구매한 신화의 브로마이드, 고등학교 때 사귄 남자 친구가 준 편지, 하다못해 내 짝꿍이 선생님 몰래 전해준 쪽지까지 모든 것이 남아 있거든…


그리고 그것은 비단 물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도, 사람도…

뭐 하나 쉬이(혹은 쿨하게) 흘려보내는 법이 없다.

그것이 지금의 내 서랍장을 잔뜩 어지럽혀 '반드시 흘려보내야만 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이 여행이 끝나갈 때쯤, '배낭여행자'라는 타이틀이 익숙해진 나는

과연 남길 것과 흘려보낼 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 이 질문은 틀렸다.

어쩌면 나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샀던 거고,

이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꽁꽁 붙잡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과연 그때의 나는

'흘려보낼 것'이라 판단된 것들을,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을까?




실제로 여행의 후반부, 나는 18kg까지 늘어난 배낭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당장 꼭 필요한 것'만 빼고 대부분의 물건을 버려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마저 버리지 못한 -필수품이 아닌-것이 있다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아 늘 지니고 다니던 순례길 표식의 조개껍데기,

구멍이 커져 한국에서 못 신을 게 뻔하지만 정이 들어 버리지 못한 아쿠아슈즈,

지금은 고장 났지만 언젠간 고쳐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들고 다니는 옛날 외장하드,

몇 개월 동안 딱 한 번 사용해봤지만, 그래도 여전히 쓸 일이 남아있을 거라 믿는 클리어 홀더,

줄이 아예 끊어져버렸지만, 이걸로 노래를 듣던 여행 초반의 추억 때문에 가방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둔 이어폰…


뭐야,

이제 보니 꽤 많잖아?


이제는 "추억이잖아"라는 주문이

새로운 대응수로 떠올랐나 보다. 젠장.








YOUTUBE <여행자may> : https://www.youtube.com/여행자may -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아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