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긴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가 온전히 내 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마음을 잘 열지 못하고, 어느 정도 참다가 아니다 싶으면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다. 한 마디로 인맥 관리를 못하는 거다. 예전에는 다이어리에 약속 일정이 가득할 정도로 사람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내 일정을 보면서 연예인이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여러 일을 겪으면서 그런 만남과 인연의 부질없음을 느끼고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한없이 낮아지면서 이런 상황까지 온 듯하다. 그냥 성격이 그지 같은 거다. 그래서 결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일한 내 편’이 생겼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사람이 ‘나’라고 해주는 사람. 언제나 따뜻하게 꼭 안아주는 사람. 남녀 간의 사랑과는 다른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소중한 느낌을 주는 사람. 바로 내 딸이다. 늦게 낳아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서 여유가 없던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면 젊은 엄마가 될 수 있었겠지만, 이런 애틋한 마음은 덜 했을 거다. 물론, 남편도 내 편이라고 하긴 하는데, 남편보다 뭔가 더 끈끈한 느낌이랄까. 남편 미안.
내가 아빠랑 사이가 좋았어서 그런지, 여자보다 남자를 대하는 게 더 편해서 그런지, 나는 나와 딸 사이보다 남편과 딸의 사이가 더 좋을지 알았다. 그런데 딸은 아빠보다 엄마가 훨씬 좋다고 한다. 고마운 한 편, 아빠와 많이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남편의 코골이 소리에 예민하던 어느 주말,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딸이 아빠에게 뛰어가서 말했다.
아빠 코 고는 소리 아주 작게 해 줘.
엄마 머리 아프잖아!!
잠결에 사과하는 남편과 나를 살펴주는 딸. 나는 남편에게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살피는 것뿐 아니라, 내 입장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는 딸이 있으니까. 정말 고맙다. 그리고 딸이 너무나 귀여워 보일 때면, 나는 딸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는 누구 딸?"이라고. 그러면 쉬지도 않고 바로 나오는 딸의 답변에 미소가 지어진다.
엄마 딸!!
정말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내가 그렇게 말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꼭 그렇게 답해준다. 가끔은 내 이름을 넣어서 “ㅇㅇㅇ 딸!”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아빠랑 같이 있을 때면, “엄마 아빠 딸!!”이라고 해주지만, "누구 닮아서 이렇게 귀여워?"라고 물으면, 어김없이 이렇게 대답해준다.
엄마 닮아서!!
아빠랑 닮은 코만 못생겼단다. 예전에는 닮았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닮은 건 인정하니 다행이랄까. 그리고 남편과 내가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을 때면,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엄마 내 거야!! 내가 독~ 차지할 거야.
아빠 저리 가.
남편은 “엄마는 아빠 거야.”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난 내 거야. 이것들아.
나는 요리를 잘하지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요리로 유명한 사람들의 레시피도 내 취향이 아니다. 재료 자체를 먹는 것을 선호하고 싱겁게 먹어서 더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아직도 여전히 아이에게 1년 동안 이유식을 해 먹였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먹는 저녁을 준비할 때면 그저 미안한 마음 한 가득이다. 이렇게 먹여도 되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내가 해주는 건 몇 가지 메뉴를 돌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잘 씹히지 않는지 구운 고기는 잘 먹지 않는데(안심은 먹는다) 푹 끓이면 잘 먹는 편이라서 고기는 카레나 국으로 먹이는 편이다.
(1) 달걀 하나를 풀고 물을 조금 넣어 섞는다.
(2) (1)의 달걀물에 조그맣게 깍둑 썬 양파, 햄, 당근 등을 넣어 휘적휘적 섞고, 전자레인지에 1분 돌린다.
(3) (2)를 꺼내서 섞은 후, 다시 1분 정도 돌린다.
(4) 주기 전에 케첩을 촥촥 뿌려서 식힌다.
(1) 달걀을 볶아서 따로 놓는다.
(2) 조그맣게 깍둑 썬 양파, 햄, 당근, 부추 등을 볶는다.
(3) (2)에 (1)의 달걀과 밥을 넣어 볶은 후, 마지막에 굴소스나 케첩을 넣어 볶는다. (케첩은 나중에 뿌려서 뜨거운 볶음밥을 식히기도 한다.)
(1) 깍둑 썬 돼지고기를 볶아서 따로 놓는다.
(2) 큼직하게 깍둑 썬 양파, 당근, 감자를 볶다가 (1)의 고기를 넣어 함께 볶는다.
(3) (2)의 재료가 잠길 정도로 물을 넣어 끓여서 국물보다 건더기가 많게 한다.
(4) 오뚜기 고형 카레를 풀어서 더 끓인다.
(1) 마른미역을 물에 넣어 불리고 물기를 빼놓는다.
(2) (1)의 미역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소고기 넣고 같이 볶는다.
(3) 물을 넣어 끓인 후 국간장을 넣어 간을 하면서 더 끓인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다. 나는 생선을 엄청 잘 먹으면서도 만지지 못해서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되는 상품을 이용하는 편이다. 아빠가 생선 가시를 발라줬기 때문인지 가시를 잘 바르지 못해서 항상 남편이 발라주는데, 이제는 딸이 나보다 가시를 더 잘 바른다. 어찌나 쏙쏙 발라 먹는지 신기할 따름.
뭘 해줘도 맛있게 다 먹어주는 고마운 딸은, 먹다가 이렇게 외친다.
엄마, 최고!!
부끄러워서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이다. 딸이 하도 엄마 요리가 제일 맛있다고 해서,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내가 엄청 요리를 잘하는지 아실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네에 아이와 함께 가는 둘만의 단골집이 생긴 거다. 음식점 별로 아이가 이름을 붙였다. 그 음식점에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뒤에 “집”을 붙인 거다. 일본 가정식 식당은 <생선구이집>, 분식집은 <국숫집>, 중국집은 <짜장면집>, 패스트푸드점은 <감자 튀김집>으로.
아이와 밥을 먹다 보면, 엄마랑 이야기 나누며 잘 먹는다고 옆 테이블에서 용돈(?)을 받은 적도 여러 번이다. 역시 어른들은 오물오물 잘 먹는 아이를 좋아하신다. 영상 보여주지 않으면서 밥 먹이는 엄마 처음 봤다며 칭찬도 많이 듣는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다가 아빠의 부재가 문득 느껴져서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다. 아이는 그걸 기막히게 알아채기도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위로해주기도 한다. 신기한 건, 아플 때 할아버지 사진을 달라고 한다는 거다. 사진이 담긴 액자를 꼭 안고 잠드는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어느 날, 하원 후 놀다가 집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놀이터에 갔다. 그네를 타던 아이는 깜깜해진 하늘을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나라는 별들이 모여있는 곳이야.
하부지도 별이야.
갑자기 그래서 놀랐는데, 다음에 이어진 말에 더 놀랐다.
하부지 보고 싶어도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면 안 돼
알게 모르게 힘든 모습을 보인 게 아닐까 싶어서 미안했다.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안 간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아이 곁에 머물며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엄마가 되면 좋겠다.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말이 아이의 입에서 나올 때면 아이의 자람이 확 느껴진다. 얼마 전엔 욕조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길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자,
물 만난 고기마냥 놀지?
라고 해서 신기했다. 그런 말을 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정확하지 않은 말로 나를 웃게 만드는 아이가 너무 귀엽다. 어느 날, 아이가 뛰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적이 있다. 무릎에 연고를 발라주면서 광고에 나오는 “새살아, 돋아라, 솔솔~”이라는 말을 하자, 아이는 갸우뚱하면서 내게 말했다.
나 아직 세 살이야?
다섯 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