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업에서 나처럼 조용히 수줍게 앉아있던 여학생을 보았다. 안경을 썼고, 눈송이처럼 새하얀 피부에 단정한 옷차림이었다."저 사람은, 기린 같아. 눈도 기린같이 맑고 예쁘고, 왠지 숲을 좋아하게 생겼어." 오늘부터 기린이라고 부를 거야. 기린도 나처럼 책을 좋아할까? 영화를 좋아할까? 말을 걸어볼까, 나도 혼잔데. 같이 김밥이라도 먹자고 해볼까?
도서관에서 그날
빨리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같이 밥도 먹고, 과제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영화 이야기도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런 친구.
유독 햇빛이 잘 들지 않았던 학교에서, 그 해 3월은 너무나 추웠고, 쓸쓸했고, 외로웠다. 대학에서 같이 고민 나눌 친구 한 명 없다는 사실이 조금 우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린을 본 것이다. 맑고 투명하고, 나랑 잘 맞을 것 같은 사람. 같이 대화하면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그런 사람.
수업이 끝나고 용기를 내서 기린한테 말을 걸어보았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내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걸로 기억한다. 기린은 나보다는 1살이 더 많았다. 기린언니. 그래, 기린언니라고 불러야지.
기린 언니한테 계속 말을 붙이니, 언니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같았다. 언니는 정말 기린처럼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기린언니와 매일 같이 도서관을 다녔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같이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영화를 보았다. 그때 당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시설이 정말 잘 되어있었는데, 늘 언니와 함께 세계 명작들을 찾아다니면서 보았다. 기린언니와 나는 영화를 너무나 사랑했고, 영화 속 주인공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유독 좋아했다.
예전에도 책에 기린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썼었다. 떠올릴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나 행복했던 기억, 기린 언니와의 학교 생활은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 캐릭터의 마음을 분석하면서, 그리고 촬영 기법을 같이 찾아보면서, 스토리를 새로 짜보기도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들처럼 매일 그렇게 같이 놀았다. 밤이 깜깜해질 때까지, 우리는 영화 속에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언니와 연락이 잠깐 끊겼다가도 서로가 한번씩은 찾게 되면서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연애상담도 해주고, 고민도 들어주고, 여전히 마음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 기린 언니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린 언니
언니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내 문제였다. 나는 기린 언니를 여전히 좋아하고, 우리는 아직도 좋은 관계였지만, 그때 당시 사업을 시작하면서 내 삶이 너무 힘들었고, 그 누구도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핑계지만, 내 하루를 챙기기도 너무나 지쳐있었다. 돈을 못 벌면 어쩌나, 이러다가 사업을 접어야 하면 어쩌나, 이 고민에 빠져 살았다. 기린 언니 말고도 가까운 지인의 경조사를 전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소중한 친구의 결혼식에 가지 않은 일은 현재 내 인생을 통틀어서 제일 후회되는 일이다.
시간이 흐르고, 내 삶이 안정되고, 돈 걱정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고, 펭귄과의 신혼집과 결혼도 무사히 준비하게 되면서, 예전에 내가 힘들다며 흘려보냈던 인연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 내가 놓쳤다. 정말 바보 같았다.
결혼식으로 이렇게 사람이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 진짜 바보 같은 놈(나 자신).....
그 후, 1년이 지났을까?
기린 언니에게 미안해서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평생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최근에 언니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린 언니의 문자를 보고, 또 보고, 또 보았다. 내가 언니에게 어떤 존재였는 지, 어떤 친구였고 동생이었는지,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줘서 고맙다는 말과 그리고 나로 인해 언니가 느꼈던 따뜻한 감정들을 장문으로 보냈다. 나의 최근 브런치 글을 보면서, 너무나 공감된다는 말까지.
언니는, 내 글을 꾸준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언니의 결혼식에 바쁘다며, 힘들다며, 흘려보냈는데.....
언니는 정말 기린인 걸까. 긴 목으로 구름과 가까이 살아서, 이렇게 사람이 맑고 투명해진 걸까? 언니의 넓은 마음씨에, 그리고 이해심에, 며칠 내내 너무 감동받아서, 그리고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순간 너무 먹먹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언니에게 미안함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언니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었다고, 언니의 소중한 추억, 나도 여전히 보물 상자에 넣고 갖고 있다고. 진심을 다해 답장을 보냈다.
나는 오늘도 기린 언니가 보낸 문자를 또 꺼내보았다. 마음이 뭉클해진다. 서운함이 있을 텐데도, 내게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주는 언니는 정말 따뜻한 사람, 기린처럼 동그랗고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이 세상의 자연물들은 모두 흡수해서 더더더더 맑아진 사람.
언니의 신혼집으로 잘 익은 망고 한 상자를 보내야지.
기린 언니, 분명히 이 글을 보면 언니가 기린이라는 건(?) 알겠지(오늘 처음 별명을 지어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