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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이유

by 여미
네가 돈을 벌어야 상대방이 안 부담스럽지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는 내게 귀가 따갑도록 자주 말한다. 한 직장에서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을 버텨내다가, (그것도 회사 사정으로) 반강제적으로 조기 은퇴를 하시고 현재도 지푸라기 엮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신다. (사실 지푸라기는 아니고 시간제 일을 하면서 돈을 버신다) 한 직장을 구하기만 하면, 어딘가에 소속되기만 하면 답답하다며 자유를 외치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프로 퇴사러인 나로서는, 이런 베이비붐맨의 따가운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매번 정곡을 찌른다. 어쩔 때는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역시 난 사람이 아니다.


덧붙여서 아빠는 말한다. 사람은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지 않고 궁둥이나 긁으면서 놀고먹는 상황에서 모임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면 '그 사람'이 얼마나 너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겠냐는 것이다. 이 사람이 돈을 벌어야, 같이 치킨도 뜯어먹고 맥주도 마시는 거지, 수입이 없는데 유희를 즐기는 것은 주변 공기까지 흐린다는 것.


ㅡ 아빠가 아직 일을 하니까 너 소고기도 사주고 그러는 거지

ㅡ 난 안 사줘도 되는데?


아빠의 주장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니, 사람이 다 상황이 다른 건데 그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이런 보수적이고 답답한 양반!)' 라며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삐딱서니를 타는 나.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는 근면, 성실을 삶의 최대 목표이자 근원이자 필수영양소처럼 들고 다니는 아빠와의 대화는 늘 '노잼'으로 시작해서 '노잼'으로 끝난다. 오랜만에 만나도 똑같은 레퍼토리의 똑같은 흐름으로 아버지의 노동철학을 듣는다. 아니, 할 얘기가 그렇게 없나. 만날 때마다 그놈의 노동, 노동 노동! 남편은 옆에서 재밌다고 듣고 있지만, 나는 35년 동안 이 얘기를 듣고 살았다. 아마 엄마 뱃속에 있을 때도 태교랍시고 '너는 튼튼하게 성장해서 꼭 일을 하거라'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가끔씩 과일을 사 먹으라는 둥, 고기를 먹으라는 둥, 소소한 용돈을 쥐어주면 삐죽했던 입술을 풀고 자세를 고쳐먹고 한마디 말한다. "예, 아버지 말씀이 전부 옳습니다"


일을 하는 이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빠의 노동철학이 조금 독특한 부분이 있다. 일을 해야 돈을 모을 수 있고, 맛있는 걸 사 먹거나 집을 사거나, 내 커리어를 발전시키거나 직업적으로 성취할 수도 있는 부분 등 여러 이유가 있는데, 아버지는 늘 '인간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상대할 때 금전적인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꼽는 듯했다. 백수라고 해서 돈을 안 내는 것도 아니고, 얻어먹으려고 사람 만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빠는 나를 만날 때 '내가(아빠 본인) 일을 아직 안 하고 있으면 네가 얼마나 나를 만날 때 부담스럽겠니? 안 그러니?'라고 한다. 나는 아빠가 제발 좀 은퇴하고 여행도 다니고 누워서 열매나 따먹고 쉬었으면 좋겠는데 뭔 소리람. 아니라고 백번 말해도 아빠의 주장은 변하지 않아서 속이 턱 막힌다. 베이비붐 세대의 환경적, 시대적 요인으로 계속해서 생산적인 일을 하고, 근면 성실의 노동자로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아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백수가 될 때마다, 친구를 만나게 되면 거짓말이라도 '나는 지금 뭔가를 하고 있음. 수입 있음'이라는 것을 이마에 붙이던지, (거짓 근황을) 밝혀야 하나 어쩌나 싶다. 아빠의 노동철학에 세뇌당한 딸내미의 삶도 쉽지 않다.




글 여미

커버사진 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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