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 게으르지만 계획 수립은 중요하다. 게으르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은 있어서, 흐르는 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는 삶은 습관이 되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내게 어느 순간 요가도 숙제처럼 다가온 적이 있다. 하고 싶고 하고 나면 얼마나 좋은지 알지만,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서 수련을 건너뛰면 버릇처럼 후회와 잡념의 물꼬가 텄다. 그런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다시 계획이란 수단으로 시간 속에 나와 요가를 욱여넣었다.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쉬어가도 괜찮은데.
지금도 충분히 요가를 즐기고 있는데.
목표 성취가 마음 안정의 지표가 아닌데.
존재의 이유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던 병이 요가에도 옮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번아웃처럼 요가를 놓아버렸다. 잠시 쉬어가자는 변명에 게으름 DNA가 깨어나 활보하며, 그렇게 좋아하던 요가를 한동안 쉬었다. 그리고 올해 초 이사를 하고 집에만 있으며 우울함을 견디던 나는 5월에 다시 요가를 찾았다.
두 계절이 흐르는 동안 굳어있던 근육은 당연하게 삐걱거렸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오는 괴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무언가 놓치고 있었다는 걸. 그 무엇에 대한 정의는 시원하게 답할 수 없지만 나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지난 수련보다는 수월하게 손을 뻗어 내려가듯 그렇게 적응해가며, 놓치고 있는 것 즉 ‘본질’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잡념으로 찬 수련은 끝나도 홀가분하지 않다. 곧 생각을 비우고 짧게나마 다시 수련을 한다. 오직 몸과 마음에 집중하면, 걱정과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사라지고 숨 쉬고 행동하는 나만이 남겨진다. 본질을 사회에서 물질에서 찾던 존재의 이유 말고, 있는 그대로 충분한 ‘존재의 인정’.
이처럼 요가는 답을 하게 만든다.
묻지 않는데, 스스로 답을 하도록 만든다.
이 것이 게을러도 요가를 지속하는 첫 번째 이유다.
치솟는 생각을 비우고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몸과 마음을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본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어디고 그다음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스스로 답한다. 어디까지라 대답하는 한계는 또 어디까지며 그 한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숨 쉴 것인지, 또 답한다. 정답이 아니라 해답을 찾는 일련의 시간. 나에게 요가는 그런 것이다.
5월 초저녁 여느 때와 같이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늘 그렇듯 끓어 안고 있는 문제의 답은 찾지 못했지만 이거대로 괜찮다 싶은 저녁이었다. 선선한 바람을 따라 걸으며 듣똑라를 재생시켰다. 여행 에세이를 쓰시는 김민철 작가님이 사회초년생 때 모은 돈을 털어 이탈리아 여행을 보낸 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어주셨다.
누구나 자신만의 별을 이마에 박고 산다.
사막의 밤이 파리의 뒷골목이
제주도의 새벽의 들판 풍경이
길모퉁이 카페에서 듣던 음악 한 줄기
각자의 이마에 박힌 자신의 별이.
이미 경험한 사람의 별은 아무나 훔쳐갈 수 없다.
그 별은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나만의 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누구나 박힌 별 하나로 평생을 산다. 뭣도 모르던 교환학생 시절이, 홀로 떠난 여행이 삶의 이정표가 되듯이. 그 경험이 별이 되어 존재하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지금 내게, 대단한 이유도 화려한 결과도 필요 없는 이마의 별은 수련의 순간인 것이다.
70분 수련 동안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땀은 간지럽지도 찝찝하지도 않다. 닦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감사할 뿐이다. 온몸의 혈액이 뛰는 생경한 감각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근래 유일했던 희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마에 박힌 별은 결국 스스로 빛난다. 남과 비교하거나 세상에 증명할 필요 없는. 단조로운 흑백 일상 속 작은 틈으로 빛나는 별이지만 어둡기에 더 찬란한 빛은 결국 내 안에서만 고고하게 쏟아지는 것이다. 그 틈새의 빛 만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이미 나는 충분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이 게을러도 요가를 지속하는 두 번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