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나 요즘 뭐 하고 지내지. 그냥 있지 뭐, 그냥. '그냥'이라는 단어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그럭저럭 괜찮다는 의미일까? 별생각 없이 지낸다는 의미일까? 혹은 '분명히 있는' 그 공허함을 '별생각 없이'라는 단어나 '괜찮다'는 단어로 갈무리하려는 의미일까. 요즘 나는 그냥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내 텅 비어버린 마음을, 그래서 초조한 눈을 감추려 하고 있어.
# 준비, 땅!
"탕!"
총성이 울렸을 때, 꽈당하고 넘어졌지. 웅성웅성. 걱정하는 소리와 안타까움의 눈빛. 멀어져 가는 뒷모습들. 그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나는 뒤쫓아 뛰지 않고 거꾸로 걷기 시작했어.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야. 트랙을 벗어나자 수많은 길이 나타났고 소수지만 각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결코 편한 길은 아니었지. 그 길은 아까 그 길보다 더 험난한 길, 길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길. 그래도 걸으면 무언가 보이겠지 했지만, 앞은 더 캄캄해지고. 불안한 마음에 이곳저곳을 기울이다 방황하고 허무하게도, 넘어진 그곳으로 돌아왔어. 내 눈앞에는 더 멀어져 가는 뒷모습뿐. 지금이라도 뒤쫓아가, 최선을 다하면 반은 따라갈 수 있어! 소리치는 응원과 비아냥. 나는 다시 선 이 출발선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다 큰 어른이, 모두가 지켜보는 여기에서, 펑펑 울고만 싶어졌다.
#낮은 수준에 중독되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구직활동을 하지 않아도, 발전하지 않아도. 당장 잘 곳이 있고 푼 돈이지만 모아둔 돈도 있고. 작은 가지를 모아 만든 작은 둥지에서 작아진 나는 그럭저럭 살만 하다. 어쩌다 내 둥지로 날아온 사람들과 대화하면,
뭔가 생각이 있겠지, 감성은 다 계획이 있을 거야. 아직 시간도 별로 안 흘렀는데 말야. 그렇지 감성?
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아냐. 제발 나를 데려가줘. 내 둥지를 흩어줘.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줘. 둥지에서 죽을까 봐 불안해 미치겠어.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 될까 봐, '그런 이야기를 했던 사람'으로 잊힐까 봐 무서워. 따뜻한 냄비에 중독되어 몸이 타 죽는 줄도 모르는 개구리가 되어버린 29의 나.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는 어디 가고
대학가 앞에서 치킨을 뜯던 친구, 시간이 흘러 용산의 와인바에서 만났다. 내가 계산할게, 걱정 말고 시켜. 친구의 넉넉한 한 마디. 그래, 고맙다.
"그런데 넌 앞으로 뭘 하고 싶냐?"
"갑자기 그렇게 진지한 얘기를 하냐, 와인이나 마셔."
궂은소리를 하던 친구는 결국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지만 마지못해 한 느낌이었다. 우리, 꿈을 이야기하기 낯부끄러운 사이가 되었구나.
이어지는 결혼 이야기, 승진이야기, 부장이야기, 연봉이야기. 나는 점점 할 말을 잃어갔다. 신나게 이야기하던 친구는 막차를 놓친 내게 15만 원이라는 거금을 쥐어주며 택시를 타고 가라 했다.
"책을 한 번 써보고 싶어. 아니면 진짜 멋진 앱을 만들 거야. 내가 쓴 책이나 앱이 사람들을 진짜 진짜 행복하게 만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게 없을 것 같은데."
"어떤 책? 어떤 앱?"
"그건 아직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일을 할 거야"
그날밤 나는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꼭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아직 어떤 앱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앱을 만들게 해달라고. 당신의 사랑을 세상의 행복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무일푼 백수의 자격지심일 거야. 친구의 성공 뒤에 비친 초조한 내 모습에서 비롯된 알량한 자존심. 그래도 취준하고 있는 친구를 조금 배려해 줄 수 있지 않나? 아니, 걔한테는 일상적인 이야기인데 너가 그렇게 느낀 것뿐이야. 질투.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친구를 위해 눈을 감고 기도했다. 친구의 꿈을 이루게 도와주세요. 더 성공하여 그 꿈을 더 크게 이루게 하소서, 라고. 그리고 나서는 나를 위해 기도했다. 꿈을 잃지 않게 도와주세요. 갈급하는 마음으로 얻은 세상의 성과에 당신과 나의 꿈이 희미해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아직 성과조차 주실 지 모르는 불안한 시간이지만, 그렇게 기도했다. 아멘, 아멘, 그리고 아멘.
#프리미어 프로와 크루즈와 나
두 달 전 다녀온 여행 영상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쌓아 올린 영상 크기만 500GB. 부시시 깬 표정으로 영상을 자르고 이어 붙인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나, 싱가폴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노는 나, 크루즈를 타고 도시 야경을 보는 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나. 하나하나 자르고 이어 붙이니 완성되어 가는 영상. 행복한 모습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편집 렌더링과 추출을 눌러놓고 잠시 숨을 돌린다. 창밖 풍경을 보고 진행 %를 확인. 그때 발견한 모니터 스크린에 비친 꾀죄죄한 내 모습. 미동 없는 입술, 비어버린 눈. 또 그 속에 비친 크루즈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