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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Apr 28. 2017

사랑의 해체 3

왜 우리는 짝사랑에 실패하는 가 1


2. 짝사랑의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다: 실패


 

 만일 스테이크를 자르듯 사랑이란 현상에 칼을 대고, 그 모호하고, 분명한 용어의 범위를 순서대로 해체해보면, 그 현상의 초입에는 반드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사랑 그 자체를 혼동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앞선 논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이 해결됐길 바란다.-


 두 가지의 차이를 연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무엇이 동질적인 지' 파악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측면에선 두 가지 현상은 동일한 특질을 갖는 데, 바로, 인위적인 발생가능성이 없다는 점과, 그 같은 현상을 경험하는 주체만이 갖는 독립적이고, 주관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주관적인 현상'이라는 특질과 관련된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조건적 정의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이므로, 이 장에선 '독립적인 현상'이라는 사랑의 비극적 측면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자. 사랑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왜 사랑만큼 달콤한 게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그것만큼 치명적인 독성을 품은 것도 없다는 듯 사랑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있을까? 간단하다. 전자는 양자간의 사랑을 경험해본 이인 반면, 대개의 사랑은 후자의 경험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포함하여, 누군가 인위적으로 발생시킬 수도 없고,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주관 내에서 발생하므로 양자간에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사랑 그 자체만큼 대중문화에 끊임없이 등장할 만큼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하필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것은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확률의 차원에서 이것은 사실이다. 만일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든 상대가 나에게 동일한 것을 발견하길 기대한다면, 과연 그 상대가 이전에 파괴적인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경험한 탓에 사랑 그 자체에 저항의식을 갖지 않거나, 혹은 사랑을 거친 적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게 될만큼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며, -즉, 마음의 문이 열려있어야 하며-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조건이기도 한, 하필 내가 그에게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만한 상대가 되야 한다는 이중적 조건을 양자간에 충족시켜야 하는 과정을 담보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바늘이 바로 그 크기에 꼭 맞는 구멍에 안착하는 것만큼 그것은 어려운 일임은 이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그러므로, '최초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험'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랑은 일방향에서 그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현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답을 알면서도 고집스레 질문하는 어린 아이처럼 굴게 된다. '왜' 우리는 내가 사랑에 빠진 그 상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을까. 왜 인류는 그같은 일방적인 사랑을 되풀이하게 되는가. '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험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방향'에 그치고 마는가. 그러나 일방향으로 발생하는 사랑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요구될 것이다.


 과연 그 현상 자체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랑은 일방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때,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사랑이란 '양자간의 사랑'일 지언정 주관 내에서 발생하는 독립적인 현상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가하는 감정을 의미한다. 즉, 짝사랑이다.- 과연 '사랑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와 교제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와 교제를 하면서도,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첫사랑의 실패로 인해서 정신적으로 불안한 인간은 사랑 그 자체에 대한 경계를 하게 되거나, 젊음을 핑계로 사랑에게 받은 상처를 감추면서 육체로부터 발생하는 물리적 이끌림과 사랑을 자발적으로 혼동하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한편, 끊임없이 짝사랑을 되풀이하는 이들도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는 듯한 이 감정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끌려다닌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비극적인 일을 인류는 늘 되풀이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이토록 비극적인 일을, 사랑의 상처로 인해서 사랑을 거부하거나, 사랑을 꾸준히 되풀이하는 등 반복하는 패턴만 다를 뿐 사랑의 파괴성에 굴복하는 현상을 모든 인간이 거치게 되는 것일까? 몹시 흥미로운 사실은, 이같은 형태의 사랑은, 설령 누군가 그러한 형태의 사랑을 최초로 겪는다 한들, 인간 존재에게 절대로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를 담보한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나를 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로 하여금 나를 인정받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종류의 광기에 사랑에 빠진 인간은 취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만일 그의 이성 취향을 비롯하여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의 수단으로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 지 알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에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그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지에 관한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해 마지 않는다고 외치는 우리에겐, 정작 그의 본질이 무엇인 지 꿰뚫고자 하는 세잔적 욕구가 없다. '그 사람이 누군 지 알고 그래?' 라는 질문에 대해 종종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 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비교적 나이브한 대답으로 현상을 얼렁뚱땅 설명하려고 든다.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만큼 완벽한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가장 먼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가?


 인간이 非인간과 차이를 갖는 특질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세계-내-존재자로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 밖을 벗어나서 이 세계에 던져진 인간은 마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필연적으로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속해있고, 반드시 세계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임무를 얻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아는 세계의 일부로서 나의 정신 속에 투영된다.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일부임을 배제하고 나는 나를 인식할 수 없으며, 이 세계는 그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특질을 안고 나를 받아들이며, 나는 그러한 세계를 생존해야 하는 나를 받아들인다.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 '유아독존'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인간은 자기 자신에 맞춰서 세계를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다. 동물은 야생에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계가 우리에게 적응하길 기대한다. 이처럼 주변 세계를 대하는 왜곡된 시선은 필연적으로 '임신'과 '출산'과 맞닿아있다. 마치 탯줄을 끊어낸 아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였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돌아가고자 욕구하는 것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에 무의식적으로 시달린다. 그곳은 나 외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절대적으로 나에게 익숙하고,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세계다. 어머니의 자궁 속은 오로지 나를 위해 마련된,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는 안온한 세계다. 그러나 자궁 밖의 세계는 다르다. 얼마나 많은 순간,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타인이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까. 

자아에 대한 인식을 갖추면서 인간은 이 세계를, -더 이상 자궁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잔혹하기 짝이없는 이 세계를- 인간은 종국에 인정하게 된다. 아무튼, 우리의 생활의 터로서 나를 철저하게 타인으로 대하는 세계 외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구가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인간은 깨닫는다. 그러나 그같은 욕구를 인간은 완전하게 포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욕구의 대상이 치환된다. 이 세계를 통해서 세계-내-존재자로서 객관적 자아를 대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불안 -완전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우리를 타인으로 대하는 세계에서 겪는 불안- 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인간으로 하여금 에덴 동산과도 같은 자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리게 했다면, 그러한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깨달음의 딜레마에서 이 세계의 일부로 자아를 편입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발생한다. 마치 자궁 속에 존재하는, 어머니와 확고하게 연결된 태아처럼, 이 세계의 일부로서 투영된 자기 존재를 인간은 스스로에게 투영된 이 세계에게 自로서 인정받고자 욕구한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끔찍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와 달리, 이 세계는 우리 존재에 별 관심이 없다. 원대한 계획을 지닌 청년도 제주도에 가는 배에 갇혀 익사할 수 있고, 내일 아침부터 가장 그럴 듯한 소설의 작업에 돌입하기로 결심한 대문호도 밤새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같은 현상이, 너무나 믿고 싶지 않고, 쉽게 믿어지지도 않지만, 언제든 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의식의 뒤켠에서 자리하고 있다. 언제든지 우리는 이 세계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소멸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인간에게 심어준다.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의 분리가능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이, 주변 세계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언제든지 이 세계가 우리를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죽음'이란 이벤트를 맞게 됨을 아는 인간은 차라리 이 세계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자기 파괴적 욕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자기를 실현하고 싶은 자기 실현적 욕구의 딜레마 위에 서서 갈등한다. 마치 언제든 지 끊어질 수 있는 밧줄 하나만 부여쥔 채 영원히 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저 배의 끝에 매달려서 망망대해를 끌려다니는 선원처럼 인간은 이 세계 위에 서 있으나, 영원히 맞붙지 못한 채 부유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생존한다. 그리고 인간 존재는 그러한 딜레마 위에서 많은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인간은 자궁 밖을 나와서 이 세계에 터를 두고 살고 있으나, 자궁과 내 뱃속을 이어줬던 탯줄과 달리, 이 세계와 우리 존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이 세계를 통해서 세계-내-존재자로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인간은 그 속에 의미없이 내던져져있을 뿐인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탯줄을 끊는 순간, 인간은 타인이 된다. 


 매 순간 나를 타인으로 만드는 이 세계와 자궁 속의 세계를 일치시키고 싶다는 욕구는 관계에 대한 모든 비극을 예고한다. 세계-내-존재자인 더 이상 자아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 정신의 필연적 결함으로 인해서 객관적으로 자아를 보게 할 순 없지만, 객관의 터에서 나의 존재를 타자로 만드는 세계에서- 이상스레 세계와 단절된 채 부유하게 된다. 어머니의 자궁 밖 세계는 나만을 위한 곳도, 나에게 익숙한 곳도, 나에게 친절한 곳도,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제공하는 곳도 아니다. 그러한 세계에 가장 쉽게 안착하는 방법은 어떻게든 이 세계를 자궁과 유사한 세계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제든지 나의 존재를 버릴 수 있는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잔혹한 세계 속 삶에 대한 애착을 이상스레 느끼게 한다. 가장 불편하고, 불안한 세계는 인간 정신이 필연적으로 품은 주관의 비극을 통해서 제 2의 자궁으로 탈바꿈한다. 이 세계를 자아에 맞게끔 왜곡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이 세계에서 영원히 타인이 되는 비극을 안고 있는 나로 하여금 개인적 영달을 꾀하고 싶은 충동을 발생시키거나, 고유성을 보호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 세계에 그것을 인정받고 싶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등 모든 욕구의 간극에서 필연적으로 불어져나오는 현상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충동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술'에 관한 것과 연결되나, 이 장에서 깊이 논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이, 다시금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존재로 하여금 '사랑'을 욕구하게 만든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이같은 현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람? 사랑에 대한 나의 착각? 아니, 그것은 이 세계에 자기 자신을 인정시키고 싶다는, 이 세계를 어머니의 자궁과 유사한 곳으로 대하고 싶다는 나의 유아기적 욕구가 발현시킨 현상이 상대를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대상은 그러한 욕구를 발현시킨 인자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세계-내-존재자로서 인간 존재는 이 세계를 향한 '짝사랑'을 영원히 하는 것과 다름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적 비극에 처해있다. 우리에겐 이 세상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으므로,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타자로서의 나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를 끌어안는다. 단순히 세계에 존재하는 것(exist)으로 살 수 없다(live)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간은 세계 속에 스스로를 어떻게든 투영시키고자 욕구한다. 바로 '사랑'이란 현상을 통해서 그러한 욕구는 실체화된다. 이 세계를 부유하게 된 타자로서의 세계-내-존재자를 인식하는 인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던지게 된다.


 이 세계는 무엇인가? 이 세계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혹은 내가 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이 세계가 나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나는 이 세계에 연결되고, 종국에 타자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정신적인 결함을 보게 하는 최초의 충격을 넘어서, 우리는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든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단순히 그것은 정신상에 존재하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초로 나의 존재를 주관 내 객관을 통해서 직면하게 만드는 그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와 연결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람이란 눈 앞에 실체를 입고 태어난 최초의 세계다. 이 소규모의 세계를 통해서 나는 정신적 결함을 안은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 나의 삶의 전부임을 선언한 상대에게 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하게 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일방향을 향하는 사랑에서 이것은 쉽지 않다. 사랑에 빠져있을 때의 광기는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이성을 가리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이 세계가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짝사랑의 가장 거대한 비극적 측면이 드러난다. 거의 모든 연애소설이 한번쯤 시도했던 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어떤 종류의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가, 에 대한 이야기다. 이 세계에 나를 인정받는 것은 나의 특질이 주변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인간은 나의 존재가 이 세계에 타자에 멎는 것을 극복하고 싶어한다. 과연 인간은 노력 여하에 따라서 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성취할 수 있을까? 혹시 살을 빼거나, 학위를 얻거나, 돈을 버는 등의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내가 입성하길 추구하는 세계가 나를 받아들이게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순 없을까? 그리고 나는 그 감성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제시할 수 있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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