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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기 Sep 02. 2019

기생충 2


기생충 2




사람들은 한 가지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SNS가 가능하다. 기술적으로 보면 모든 컴퓨터 장치들은 하나의 IP 주소를 가지고 연결된다. 그러나 인식의 세계로 오면 세계는 복수가 된다. 고시원에서 삼수를 하면서 지내다가 서울대 들어간 사람은 합격된 그 순간부터 서울대라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고시원에서 여전히 지내던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가 된다. 지방에서 올라온 삐쩍 마른 여자애가 고시원에서 살면서 입시공부를 했다. 당시에 고시원 총무를 하던 30세 남자는 그녀와 잠시 썸을 탔다. 자신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차였고, 제법 그 세계에 익숙했고, 지방서 올라온 여자애를 지도 편달해주었다. 남자는 그녀가 결국 자기와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용돈이 생기면 맥주와 치킨을 사다가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그녀는 거쳐를 학교 근처로 옮겼고, 둘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4학년 때 그녀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졸업하고 연수원에 들어가고, 다시 몇 년 뒤에 검사가 되었다. 그녀의 30세에 만나는 사람들은 사법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30세 남자가 살았던 고시원의 세계는 있는가? 남자는 이제 마흔이 되었고, 계속 낙방하던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개인사업을 시작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반지하에서 살고 있다. 물론 그 사이에 결혼도 해서 아이가 둘이나 된다. 10년 전 두 남녀는 같은 세계에 살았다. 그 후, 너무 벌어져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다른 법칙이 작동한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간 공간대에 있지만,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병행해서 존재한다. 이것을 사회학적 평행이론이라고 이름을 붙이자. 




10년의 세월이 다시 흘렀다. 영화 장면에 10 year later라고 자막이 나온다. 여자는 40세, 남자는 50세가 되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가서 손을 내밀까? 자신이 없었다. 소심한 선택을 한다. 이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없다. 그녀는 결혼을 했으며 이제 국회의원이다. 너무도 멀어진 두 세계는 다시 만날 수 없다. 




영화는 이 두 세계가 겹쳐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하면서 만들어졌다고 나는 추측한다. 두 세계는 합리적으로 조립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 취업을 하면 된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들이 사는 세상에 운전기사, 가정부, 청소부, 정원사 등으로 취업하면 된다. 정원에 심긴 나무에 사는 다람쥐의 눈에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이 부자인지 가난한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궁전에서 귀족과 신하가 같이 살아가는 것과 같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자 계급에 맞는 관습이 있다. 관습은 사회적 경계선이다. 귀족은 그 관습에 맞는 언어와 행동과 특권을 가지고 있고, 신하와 노예는 별도의 관습이 있다. 같은 물리적 공간에 있어도 사회적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함부로 노예가 귀족에게 '아내를 사랑하시지요?'라고 개인적인 질문을 감히 할 수 없다. 다른 귀족 친구들이 술을 마시면서 '야, 자네는 아내를 사랑하냐?'라고 물을 수 있다. 




만일 노예가 귀족에게 저런 질문을 했다면, 관습은 깨지게 되고, 혼돈이 시작된다. 운전기사 기택은 박사장에게 '아내를 사랑하지요?'라고 대뜸 질문을 한다. 박사장이 움찍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 놈 봐라'.. 한번 더 그 같은 질문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칠 것이다. 


"김기사, 운전이나 해"




두 세계는 한 공간에 있지만, 경계선을 유지하면서 충돌하지 않는다. 서로 공적 영역에서만 만나고 사적 영역인 침실은 침범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건사고도 없다. 




사고란 사적 공간인 침실이 들켜버릴 때 발생한다. 기태네 가족이 여행 떠난 박사장 저택에서 술 먹다가 별안간 들이닥친 주인네 식구들을 피해서 거실 탁자 밑으로 숨어버릴 때, 기태는 박사장으로부터 자기를 바라보는 속내를 듣게 된다. 인간적인 모멸, 존재를 부정당하는 모독을 당한다. 김기사 몸에서 냄새가 나. 반지하 냄새. 




폭우를 피해서 하염없이 낮은 동네로 피해 달아나는 기태의 세계와 거실에서 섹스를 하는 박사장 부부의 우아한 삶이 극명하게 부닥치면서 서로의 세계가 얼마나 지랄 맞은 비극인지를 보여준다. 로스엔젤러스 태양 같은 상큼한 부자들의 세계와 뭘 해도 구질구질한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는 종이 하나 차이만큼 가깝다. 기태는 몇 시간 전까지 양주 꺼내서 정원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 술을 마시면서 웃었다가 이제 폭우를 피해서 반지하 동네로 내려왔다. 집에는 물이 차서 모든 가재도구가 엉망이 되었다. 변기통은 똥물이 역류한다. 




그렇게 체육관에서 잠을 설치는데, 아침부터 사장 내에서 전화가 온다. 아이 생일파티를 하기로 했으니, 장 보러 가게 빨리 와달라는 것이다. 두 평행 세계가 겹쳐지지 않고 보이지 않을 때는 살던 대로 살았다. 이제 부자의 세계는 가난을 더욱 가난하게 보게 만드는 분노의 원인이 되었다. 부자의 세계에 편입해서 즐기고 싶다는 것은 그 세계에 도달하기 전까지 희망사항이었다. 기태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은 부자의 세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냄새나고 천한 인간. 박사장이 기태의 칼에 찔리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자업자득이었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도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 친구로부터 모욕을 당하면 단교하게 된다. 자기의 잘남을 말하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깍아내리게 되면 결국 화살은 당사자에게 돌아온다. 




가난한 기태의 세계는 어차피 생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했다고 폭로가 되더라도 뭉게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이중적일 수밖에 없고, 윤리의식이 낮다. 반면, 박사장의 세계는 느낀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주변에서 알아서 수용해야 하는 세계다. 그래서 부자들은 약자들에게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고 그들을 경멸한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게 되면 가난한 자들은 거짓말이 발달하고, 부자들은 분노조절이 안되게 된다. 




분노하는 부자와 거짓말하는 가난한 자는 사건 사고의 양분이 된다. 기태가 거짓말을 멈추고 분노를 폭발하게 되는 것은 그의 딸이 칼에 찔리고, 집이 홍수에 잠기고, 아내가 흉악범과 싸우고, 그 와중에 박사장은 제 식구를 데리고 도망가려고 차 열쇠를 달라고 소리치면서 였다. 




건축가가 세운 근사한 저택은 두 세계가 충돌하면서 흉가가 되어버리고 만다. 주거공간이라는 사회학적 대상으로 본다면, 시각적으로 뛰어난 건축물도 엉성한 축대로 만들어진 부실 건물이 되어버린다. 부자와 빈자의 공존은 충돌과 비극을 품고 있다. 부자들의 오만과 편견은 자기 목을 향한 과도가 된다. 박사장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예와 존경심을 지켰다면, 적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줄곧 자기만의 벤즈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허상이다. 아무리 돈과 명예를 지니고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가지지 못하면 가난한 이웃들로부터 반감을 얻게 된다. 기근이 왔을 때 곳간을 열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하인의 여식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배려해주던 주인이 존경을 받는다.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회적 배려와 존중을 유지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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