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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니는 분들께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28-2편

by Simon de Cyrene

2021년 8월에, 제 나름대로는 큰 용기를 내어 시작한 이 시리즈를 이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제 일들을 하면서 생각을 그때그때 정리하면서 쓰다 보니 오래 걸리기도 했고 부족한 점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가 믿을 수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이 시리즈를 보여드리고 다듬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 브런치에서 쓰는 다른 글들은 책으로 출판하기 위한 노력을 해오지도 않았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지만 이 시리즈는 잘 다듬어서 기회가 된다면 책으로 출판할 수 있도록 해보려고 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비판과 이야기들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개신교계의 분위기상 이런 이야기들을 목회자들은 입 밖으로 꺼내서 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과 그 제약은 인정해야겠죠. 그런 상황에서 목회자들은 할 수 없지만, 제가 세상에서의 기준으로 갖고 있는 스펙과 배경이 이 이야기를 책으로 나오게 해 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서 아는 분들에게 링크를 드려서 다듬고 어떤 방법으로든 출판이 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될 때까지 해볼 생각입니다. 가늘고 길게. 저도 제 생업은 챙겨야 하니까요...


제가 이 시리즈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제게 개신교는 way of life이자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으시는 분들은 진리가 여러 가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글쎄요. 그 주장에서 솔로몬에게 아이를 데려와 서로 자신의 아기라며 우기는 두 어머니 중 실제로 자신의 아기가 아닌 것을 아는 여인이 '아기를 반으로 잘라서 나눠가져라'라는 솔로몬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은 저뿐일까요? 진리가 어떻게 한 개 이상일까요? 만약 A와 B가 대립하는데 A도 옳고 B도 옳다고 한다면 그게 가능할까요?


저는 사실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 목숨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고통과 힘듦을 인내해야만 하는데, 그럴 바에는 그냥 지금 세상을 떠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게 개신교 신자라는 정체성은 삶의 이유입니다. 제가 구독자 숫자가 줄어들고,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는 분들은 불편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써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에게 들릴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시리즈를 일단 마무리하고 나서도 다듬고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을 계속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안다고 착각하고 다니시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이 시리즈를 읽으신 교회 다니신 분들께는 의심하고, 묻고, 따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과정이 없으면 절대로 성경도, 세상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의심하고, 묻고, 따져야 목회자들도 공부하고, 고민하고 기도합니다. 목회자들이 의심하지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면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큰 믿음이라고 하는 건 거짓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믿음이 큰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가 자신의 상처를 만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진리라면 의심하고, 묻고, 따질수록 더 진실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데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중 상당수는 묻지도, 의심하지도, 따지지도 말라고 하지요. 그게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을 병들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씀이 진리라면 왜 의심하지도, 묻지도, 따지도 말라고 하는 걸까요? 만약 당신이 도둑으로 몰린 상황이라면, 당신이 도둑이 아니라면 누군가 묻고, 따지는 것을 두려워 할까요? 아닐겁니다. 무엇을 물어도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도둑질을 했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묻고, 따지는 것을 회피하고 싶고 짜증을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에서 묻고, 의심하고, 따지지 말라고 하는 건 복음이, 성경이, 말씀이 진리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진리라면 그런 질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왜 한국교회에서는 묻고, 의심하고, 따지지 말라고 할까요? 그건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중 상당수가 공부하고, 고민하고, 기도하지 않고 권위로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대접만 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와 목회자가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목사님이 매주 설교 후에 공개적으로 다양한 질문을 받고 답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의심하고, 묻고, 따지세요. 저도 그랬고, 그래서 힘든 시간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기도하고, 공부하면서 저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고, 개신교적인 성경해석만이 진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제 힘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제 모습이 안쓰러워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루트로 제게 말씀해 주시고, 알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신교 신자로 '남은' 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개신교가 진리를 담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이 없었다면, 저는 전형적인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거나 교회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긴 터널을 지나, 아직도 광야를 지나고는 있지만 이제 저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고 그 어느 때보다 살고 싶습니다. 그것도 오래, 오래 살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에 제 안에 계획하신, 저를 만드신 이유를 최대한으로 살아낸 후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이게 제가 고백할 수 있는 저의 신앙과 삶의 이유입니다. 제게 이 시리즈는 그 고백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제가 알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삶의 이유를 나누고 싶어서 썼고, 누군가에게는 그게 의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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