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26편
보수적인 부모님 밑에서, 보수적인 교회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타고난 반골기질이 있는 것인지, 그분이 내 안에 심어놓은 돌연변이 같은 유전자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항상 "왜?"를 물어봐야만 생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나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인 사람들과 조금이라고 하기엔 많이, 그렇다고 해서 또 이단이라고 하기는 힘든 수준의 신앙을 갖고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교회에서 하지 말라는 것들이었다. 그 첫 번째 난관은 혼전순결의 문제. 사춘기를 당시만 해도 보수적이었던 우리나라의 분위기보다는 조금 더 개방적인 미국인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엄청난 혼란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학교나 스쿨버스에서 누구와 누가 사귀고 잠자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하고, 옆집에 사는 여사친은 콘돔을 색깔별로 모으는 중학교 생활이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의 환경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 않을까?
거기에 더해 한창 혈기가 왕성해지는 사춘기를 지나며 지금처럼 야동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쉽진 않지만 불법 DVD나 부모님이 안 계실 때 19금이 붙은 영화를 친구들끼리 모여서 보기도 할 때면 죄책감에 화면을 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당시에 야한 장면이 나올 것 같으면 화장실에 잠시 가거나 바람을 쐬러 집 밖으로 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욕구와 욕망이 눌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었고, 내 안에 성적인 호기심도 커졌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유는 설명해주지도 않고 혼전순결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강압적으로 강요했고,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말했다. 마음으로 짓는 죄라는 말이 잘못된 말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상상이나 마음이 아니고 그런 것들이 호르몬 작용으로 인해 생기고 욕구와 욕망이 오가는 데 그건 무엇이란 말인가? 사춘기를 시절에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쓰레기고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한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들의 반응들은 놀랍도록 한결같다.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기보다는 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면 죄인이라고, 그냥 믿으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믿음이 작거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소위 말하는 '세상'의 논리는 탄탄했다. 세상은 성적인 욕구와 욕망이 생겨나는 건 번식을 위한 자연 스스럽게 생기는 것이라는 설명으로 내가 나쁘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줬고, 술에 대해서는 만약 술을 절대로 마시면 안 된다면 왜 예수님이 행하신 첫 기적이 술을 만드신 것이냐고 반박했다. 그 논리가 훨씬 탄탄하고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이러한 논리에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대항할만한 논리를 성도들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에 나가면서도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고 술에 찌들어 살면서도 교회 안에서만 착한 척, 거룩한 척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나쁜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이고, 그들을 설득해 내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교회의 잘못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술을 강요받고,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는데 그저 마시지 말라고만 한다면, 교회가 생계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닌데 그 장벽을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만약 교회에서 사람들이 혼전순결을 지켜야만 하는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제시했다면, 술을 마시지 않거나 최대한 자제할 이유를 설명해 줬다면 그들도 그러한 율법들을 지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율법들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그런 율법을 어긴다고 해서 당장 지옥에 가거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러한 원칙들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이유가 있고, 그러한 원칙들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관점에서 더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다.
우선 혼전'순결'에 대해 살펴보자. 개인적으로 이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는 성관계를 갖는다고 해서 누군가가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후관계의 원칙을 지켜야 할 이유로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놀랍게도 몇몇 젊은 사람들도 유튜브에서 지금까지도 '성관계는 영적인 소통이기 때문에 결혼 관계 안에서만 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것을 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성관계를 하는 과정에서 영혼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성관계만 그러한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은 온갖 것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성관계만 그렇게 유별나게 취급할 이유가 없다. 교회들의 이러한 논리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그래, 성관계만 안 하면 되지'라며 오히려 다른 변태적인 성적행위들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건 괜찮은 건가?
아니다. 그러한 스킨십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변태적인 성적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분출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러한 행위들은 적지 않은 경우 상대가 그 행위를 통해 사랑을 경험하기보다는 좋은 경우에 쾌락, 나쁜 경우에는 고통을 겪게 만드는데 쾌락만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쾌락적인 성적행위는 자극이 강해지지 않으면 만족감을 주지 못하다 보니 그 행태가 더욱 가학적이거나 변태적으로 될 수 있는데, 그러한 욕구와 욕망은 어느 순간에 가면 본인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의 고통에 대한 부분인데, 우리가 성관계의 '첫 경험'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혼후관계라는 원칙은 지켜질 확률이 매우 높다. 이는 남자보다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른데, 남자인 나는 이 사실을 어쩌다 보니 여사친들의 첫 경험에 대해 듣게 되면서야 비로소 이해를 하게 되었다.
사실 남자들은 어지간해서 여사친의 첫 경험에 대해서 들어 볼 일이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외모와는 달리 어렸을 때 동생들이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수다도 떨고 여사친이나 누나, 동생들과 친하게 어울려서인지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 번 정도 여성의 첫 경험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은 심지어 속궁합을 매우 중요시하고, 연애는 한 번도 쉰 적이 없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이야기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은 그 친구의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시점에 그 친구는 기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갖지 않고 살기로 했는데 아이가 생길까 봐 두려워 피임을 한 경우에도 부안 하면 사후피임약을 거의 항상 먹는다는 그 친구 말에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그 친구를 포함하여 내가 직접 첫 경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었던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여자들은 첫 경험이 좋거나 유쾌할 수가 없겠더라'는 식의 대화를 나눈 여사친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그 이야기에 동의했다. 사실 이 문제는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거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처음 성관계를 갖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아이가 들어서는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내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추측컨대 경험이 늘어나고 피임법과 조절하는 법을 잘 알게 되기 전까지 여자들은 항상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아니, 성관계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도 몸에 살짝 이상징후가 발견되면 여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를 갖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기되는 반박은 '아이가 그렇게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오죽하면 최근에는 아이가 먼저 생기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현실적으로' 쉽게 생기지 않는 것과 심리적인 불안함과 두려움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이가 쉽게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혹자는 낙태를 하면 되지 않냐고 할지 모르나 낙태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크기 전까지는 아이나 생명체라고 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아이를 떼어버려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던 무엇인가를 없앴다는 것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낙태를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낙태를 너무 많이, 자주 하는 것은 여성의 몸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성관계를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사랑일 수 없다. 그리고 혼후관계는 율법으로, 이유도 없이 지켜지야 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지켜질 확률이 매우 높은 율법이다. 또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돌이키지 못한 죄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실 성관계 외에 다른 모든 스킨십도 그것을 두 사람이 모두 사랑의 표현이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정당화될 수 없고, 반대로 두 사람이 모두 그에 대한 책임을 질 마음을 갖고 오롯이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건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율법들,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이해에 바탕해서 하지 않는 게 좋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건데, 이 부분이 사실 우리나라 교회의 모순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만약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다 하지 않아야만 한다면 돼지고기도 먹으면 안 될 텐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돼지고기는 먹으면서 혼후관계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런 식으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믿고 실천을 강요하는 것의 끝에 나올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은 '일부일처제는 성경적인가?'인 것이다. 나는 실제로 어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구약에서 보면 일부다처제가 기본이었던 것은 그건 남자들이 절대로 한 여자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일부다처제가 사실은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다. 이게 말이 되는가? 만약 인간이 그러한 존재라면 하나님은 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여러 명 만들지 않고 한 명만 만들었나?
술과 담배도 마찬가지다. 그냥 무조건 마시지 말고,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줘야 하고 특히 술의 경우 술이 술을 먹으면서 우리가 부지불식 중에 하나님보다 술을 더 우선순위에 높게 놓게 될 수 있음을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고민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이 있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술에 대한 성경말씀들은 이 책을 참조하시기를 (링크))
하지만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목회자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보지는 못했다. 왜 그럴까? 불편하기 때문이거나 그에 대해 본인이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것 같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면 본인의 생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본인이 현실의 문제를 생각하거나 고민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고통과 고난 속에서 고민하고 몸부림친 적이 없다 보니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헤어릴 줄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그런 얘기들을 교회 안에서 하지 않는다.
그게 진정한 목회자의 모습일까? 예수님은 평화롭게 좋은 말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기득권에 반기를 들며 진리를 전하셨고, 약하고 힘없는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셨다. 그런 예수님을 롤모델로 삼는 것이 기독교인일 텐데, 우리나라 목회자들 중에 그런 마음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은 본인들조차도 맹목적인 신앙을 갖고, 교회를 회사와 생계 해결의 수단으로 여기며 교회에서 일한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이라고 말했다. 뭘 먹든지 마시던지 상관이 없단 얘기다. 다만 그와 함께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라고 말했고, 이는 다름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단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적인 교리 안에서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행위나 삶의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을 1순위로 놓고 산다면 하지 않는 게 낫거나 하지 않게 되는 것들은 존재한다. 오늘날 교회는 그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해 줘야 한다. 그래야 합리성과 이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사람들이 설득될 수 있고, 그렇게 설득되어야 하나님 앞으로 조금씩 나올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건 숫자를 늘리는 게 아니라 인문학, 사회학 등을 통해서 '사람에 기반한 이해'를 통해 왜 성경과 율법이 진리인지를 설명할 줄 알게 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