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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에 대한 시선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24편

by Simon de Cyrene

나는 법을 공부했고, 여전히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다. 그렇다 보니 주위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더군다나 헌법 전공자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진 또 다른 개신교 신자이며 법학 박사이자 변호사인 형은 한동안 내게 이걸 봐라, 저걸 봐라는 식으로 영상들을 공유하고 자료들을 던졌다. 그 형은 진심으로 내가 나서서 글을 쓰길 바랐던 것 같다.


거절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내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건 핑계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난 이 땅의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내가 믿는 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 때, 광야에서 살아갈 때, 나라도 없이 살아갈 때 이 땅의 질서와 현실이 '성경적'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성경적이지 않은, 탐욕과 음란과 욕구와 욕망이 넘치고 왕을 위한 법제도가 만들어져 있는 국가에서 버텨야 했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단련시키고 지키셨다.


기독교, 최소한 개신교는 이 땅을 이 땅의 법과 제도를 통해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구교(천주교)는 종교개혁 이전까지 국가 위에 종교를 놓고 다스리길 원했고, 지금도 로마에서 전 세계의 종교망을 두고 통치에 가까운 통제를 하지만 개신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화가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목표로 한다. 개인과 자유라는 개념의 뿌리도 개신교의 시작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개신교신자들이 특정 법률을 특정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면 조금은 소름이 끼친다. 동성결혼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 앞의 글들에서 설명했지만 난 동성결혼이 단순한 '다름'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창조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지금은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우리가 아직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과학이 더 발달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사실도 발견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건 '타고난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만약 그러한 차이가 정말 존재한다면 지금 정도의 과학 수준에서도 그 원인이 발견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란 것은 동성애자들이 갖는 생물학적 특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단 의미지 그게 '동성애적 성향은 타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란 것은 오히려 동성애적 성향은 태어난 후에 우리의 마음과 경험이 어느 지점에선가 왜곡이 일어남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향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난 동성결혼을 제도화하는 것에 반대하는가? '지금으로서는' 반대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 중 대부분이 동성결혼을, 동성부부가 꾸린 가정을 가정과 결혼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동성결혼과 동성부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동성결혼과 동성부부는 당연히 법적으로 용인되어야 할 것이다. 법제도는 이 땅에서, 그 법제도가 적용되는 사회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변화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무엇일까? 난 모든 사람들이 동성결혼과 동성부부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정말 그런 것일까?'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할 수 있게, 개신교적인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부분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내용을 개신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 토론도 하고, 그들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개방적인 마인드로 세상과 소통을 해야 사람들이 조금씩 개신교 신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랑할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의지로 그 성향을 가진 사람도, 그러한 성향을 의지와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단 것이다. 차라리 '모르겠고, 이해가 안된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게 정직한 반응이 아닐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게 있다.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신뢰할만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평생 공부를 안 해서 항상 학교에서 꼴찌를 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하면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있을까? 변호사 자격증은 땄지만 10년 동안 놀고먹느라 일은 안 했다면 그 사람에게 사건을 맡길 사람은? 의사면허증은 있지만 30년 전에 면허를 땄고 수술을 10년 동안 하지 않은 사람에게 수술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법제도에 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건 공부를 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과외를 받거나, 변호사 자격증만 있지 법정에 들어가 본 적 없는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기거나 수술을 해 본 적 없는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툭하면 세상과 자신들을 가르고, 자신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개신교 신자들의 말을 누가 들을까? 개신교 신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들이 듣기를 기대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기꺼이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법제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그 이야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특정한 법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어떠한 정신을 이어받고, 어떠한 가치를 갖고 그 법을 만들려고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악인을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삼기도 하지 않았나?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가 이 땅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에서 잘못된 부분들이 그대로 유지된 상태로 입법이 된다면 그에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지금, 이 시점에 이러한 법률이 통과되는 것을 막지 않으셨는지, 왜 그 법률이 통과되도록 '허락' 혹은 '방치'하셨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러한 결과를 허락하신다면 그건 어쩌면 그렇게 해야 이 땅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더 깊어지고, 고민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개신교 신자들에게 더 중요한 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고, 나의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행하는 것이다. 그게 차별금지법이 차별되는지 여부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차별금지법을 통해 개신교 신자들의 입을 막으신다면, 그건 개신교신자들이 입을 여는 게 오히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질서가 세워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개신교 교회들이 반대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개신교 신자로 써가 아니라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수준의 제한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표현의 자유는 개인과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근대 입헌주의국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특정한 종교적 신념에 대한 말을 하는 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그 말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뭐가 있을까? 그러한 논리라면 '살이 찐 사람은 빨리 죽을 수 있다'는 말도 살찐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말을 해서는 안되고, '공부를 잘해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식의 표현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될 수도 있다. 억지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말들이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미국에서 나온 사례 중 하나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자신이 만든 케이크가 동성부부의 결혼식에 쓰이는 게 싫어서 케이크를 팔지 않은 사례는 애초에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맥락에서 다뤄질 필요가 없다. 그러한 종교적 신념은 개신교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 내면에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가장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들을 찾아가셨는데,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발자취를 따라가겠다는 사람이 그러한 방식으로 동성부부를 대하는 것은 애초에 성경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그러한 것을 통제하는 건 오히려 이 땅에 성경의 원리가 구현되도록 강제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표현의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최대한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리고 사실 누군가에게 직접 비난이나 비판을 하는 건 현재의 법제도 하에서도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이 굳이 별개의 법제도에 담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구심이 있다. 그러한 법제도는 법체계를 비대하게 만들고 어떠한 경우에 어떠한 법률이 적용될지를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에 그러한 내용은 포함될 필요는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관련성이 없는 사실 때문에 현실적인 차별은 금지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한을 하는 법률은 마련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온갖 이유로 편 가르기를 하는 문화가 있는 사회에서는.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개신교 교회들이 플래카드까지 만들어 붙이면서 반대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종교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의, 세상의 질서의 문제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법제도나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왕이 되길 기대하며 누가 예수님 옆자리에 앉을지를 놓고 다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에 대해 종교를 앞세우는 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 땅의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아는 인간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을 도구로 사용해서 선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특정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 또는 방치하는 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본인의 삶 속에서 우선 성경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부터 제대로 하는 게 진짜 기독교인이 아닐까? 정말 막아야 할 일이라면 하나님이 누군가를 사용해서 어떻게든 막으시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하기 전에 그게 나의 마음인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매일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나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상황을 따라가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전부다. 나머지는 나의,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 내게 차별금지법은, 내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분야가 아니다. 내겐 다른 소명이 있고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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