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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결혼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25편

by Simon de Cyrene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인 나는 10대 때부터 결혼에 대하여 많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 결혼은 교회 다니는 사람과 해야만 한다거나, 배우자 기도는 구체적으로 할수록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말도 들었고 심지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많이 낳는 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데 기여하는 것이란 말도 들었다. 결론부터, 그것도 과격하게 말하자면 다 헛소리다. 어느 하나 성경에 근거도 없는, 정말 심하게 표현하면 '무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폄하하는 말'들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으면, 그 아이들이 전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나? 아니다. 내 주위에는 교회일에 열심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어렸을 때 교회에 다녔다'는 사람들은 더 많다. 분류를 한다면 나도 '모태신앙'에 들어가지만 내가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신앙은 부모님 태 안에서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신앙이 곧 자녀의 신앙이 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수많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보여주고 있다. 그 이론대로라면 다윗의 아들들은 왜 그 모양 그 꼴인가? 하나님은 많이 낳아야만 이 땅의 창조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없는 존재인가?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에 분노하게 되는 건 이런 생각은 '나의 힘과 노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아는 개신교 신앙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고 믿는 개신교 신앙은 '나는 나의 힘과 노력으로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고, 하나님이 나의 힘과 노력을 들어다 쓰셔야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단 건 무슨 말인가?


반드시 기독교인과 결혼해야 한단 생각은 어떠한가? 성경에서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이 신약과 구약에 모두 많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멍에를 같이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구약에서는 곳곳에서 이방인들과 혼인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번 물어보자.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전혀, 아예 결혼하지 않았나?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이방인들과 결혼을 많이 했단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솔로몬도 이집트의 여왕과 결혼하지 않았나!


뒤에서 이유를 설명하겠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안전하고, 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곧 반드시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고? 이는 안전하고, 편한 게 반드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심어놓은 계획을 이 땅에서 살아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기독교는, 구교는 내가 잘 모르지만 최소한 개신교는 "인생 편한 게 좋은 거야"를 말하지 않는다. 내가 개신교 신자로 남은 여러 이유 중 한 가지는 개신교 교리와 성경은 냉혹하리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네 인생이 쉽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것, 편한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도, 단순히 달라고 하면 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석되는 말씀들이 있긴 하지만 그 앞뒤를 같이 읽으면서 맥락적으로 살펴보면 그 안에는 항상 '네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을 전제하고 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네가 원하는 것을 줄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반드시 교회 다니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니... 앞뒤가 안 맞지 않나?


배우자기도를 길게 쓰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말이 안 된다. 배우자기도를 20개, 30개 열심히 써서 그대로 들어주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함께 5년, 10년, 20년 살아본 후에 돌아봐도 상대가 당신이 기도한 그 모습 그대로인가? 장담하건대 아닌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부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내가 000을 달라고는 기도를 안 해서 이런 배우자를 얻게 되었네'라고 말한다. 그 말이 잘못된 것은 그 말은 하나님이 본인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지 않으셨단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배우자기도가 미신인 가장 큰 이유는 배우자기도를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20-30대에 사람들은 대부분이 본인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람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미숙한 상태에서 기도를 하는 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게 아닐 확률이 매우, 매우 높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들어서 그 항목을 그대로 들어준다면 그게 신이,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사람이 할 짓인가? 그건 마치 20대에 처음 차를 사는 자녀가 차를 볼 줄도 모르면서 큰 사고가 나서 뼈대가 망가졌던 차를 겉이 번지르르한 것을 보고 사달라고 하면 그 차를 부모가 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부모가 그런 차를 사줄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말은 다른 주장들보다 반박하기가 훨씬 쉽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라고 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결혼을 안 하는 게 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더 성경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수많은 미신을 낳은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기 전에 고린도전서 7장 27절부터 결혼과 관련된 내용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다. 요지는 '결혼을 하게 되면 다른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집중할 수 없게 될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것도 괜찮다'라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양가에 신경을 쓰게 될 것이 많고, 현실에서 신경 써야 할 요소들이 많아지니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없게 되니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않는 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굉장히 신실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야 한다. 외부의 풍파가 엄청나게 불어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바울과 같은 수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타협하고, 무너지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잡아먹힌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멀어진다. 혼자 사는 사람들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책임질 부분이 적어지다 보니 더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이기적이 되는 사람들도 많다. 편하기 때문에, 자신만 돌보면 되기 때문에.


하지만 건강한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 가정은 그 사람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리고 많은 것이 그렇듯 결혼생활도 버티면서 두 사람이 서로 깨어지면서 맞춰나갈 수만 있으면 두 사람이 손을 붙들고 하나님 안에서 버티는 게 더 쉽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부모가 아이를 보는 시선이 인간의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시선과 비슷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다는 면에서 낳지 않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고, 또 이 세상에 좋은 것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결혼생활을 무난하게, 자신과 비슷한 신앙의 색을 가진 사람과 하는 게 편하고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내 친구 중에는 본인도 신앙이 대단하지 않으면서도 희한하게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연애를 하면 상대는 스스로 교회를 나가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친구는 심지어 연애하기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여자친구가 그 친구에게 '너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 같다'라며 이별통보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동생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이 오히려 그 친구가 더 악착 같이 하나님을 붙들고, 자신의 배우자를 섬기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친구의 삶은 세상적으로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축복이 넘치는 삶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모두 다른 것을 심어놓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혼의 문제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본인의 신앙이 굉장히 굳건하거나 교회에 다니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거나 심지어 교회를 증오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렸을 때도 하나님 앞에 나와지는, 때로는 그런 환경에서 더 하나님을 붙들게 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20-30년 기도를 한 끝에 교회를 증오했던 배우자가 그 사람보다 더 깊은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결혼생활은 축복이 아닌가?


성경에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라고 한 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매우 약한 존재였고, 다른 문화를 가진 종족과 결혼할 경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이 심어놓은 가치와 문화와 전통이 망가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신앙도 그렇다면 그 사람은 최소한 교회를 증오하지는 않는, 가능하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게 안전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중 누구도 결혼을 하기 전까지 우리 안에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게 심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신앙적 색이 어떠한지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봐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개신교 신자라면 머리로 막거나 거부하기보다는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묻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사람과 함께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평안한 마음이 생긴다면, 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그림이 그려진다면, 그것을 막는 것이 없다면 기꺼이 그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모험을 하는 게 '개신교적인 선택'이다. 가정이 사역지가 되어야 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결혼하지 않고 살 거야'라는 말을 하는 소위 말하는 '독신의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개신교 신자라면 , 축하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거, 꽤나 오만한 마음일 수도 있다. 이는 최소한 바울 정도의 믿음 정도는 되어야 세상 한가운데서 혼자 살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도 유대교 전통에 비춰봤을 때 회심하기 전에 결혼을 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게 다수설이 아닌가? 본인이 그 정도로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하거나 오만방자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우리는 대부분 혼자의 힘과 노력만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고리를 단단하게 유지할 능력이 없다. 이게 팩트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결혼하는 게, 그것도 가능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하는 게 '안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도 낳는 것이 좋은 점들이 많다. 하지만 아이를 꼭 낳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에 마치 답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그리고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개신교의 핵심은 신과 개인의 관계는 '1대 1'이란 것이다. 신은 누군가를 통해 말해줄 때도 있지만 개신교적인 교리에서의 기본은 자신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묻고, 의심하고, 방황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살아가며 버티다 보면 우리를 우리보다 잘 알고,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맞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타이밍에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 그게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고,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최고가 아닐 수 있어도 내게 가장 잘 맞는 것임을 믿고 신뢰하는 것. 그게 개신교 신앙의 전제이고 기초다. 이는 결혼과 출산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 수도 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게 이해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묻고, 들으면서 순종하면서 걸어간 길은 하나님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일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장기적으로 우리를 가장 우리에게 잘 맞는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맞춤형으로. 진짜 중요한 건 우리가 그걸 알아보는 눈과 마음을 갖추는 것이다. 그걸 갖추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모르다 보니 불평불만만 늘어놓다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최선을 다했어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는다면 고민하고, 묻고, 따져야 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나를 더 알아가게 된다.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이혼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고린도전서는 10장 23-24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하지 않나? 성경은 이혼할 수 있는 가능성도 곳곳에서 열어놓고 있다. 그런데 그 맥락을 보면 이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혼을 금지한 것은 당시에 있었던 남성우위적인 문화 속에서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결혼한 후에 이혼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관계를 어떠한 이유에서든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본인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 결정의 결과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을 본인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참지 못하고 깨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결혼생활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당사자만 알 것이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 또는 방치하시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길이 더 힘들 수도, 고통스러울 수도,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아닌 이상 하나님은 그 일도 허락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어떠한 것에도 무조건 지켜지여만 하는 정답은 생각보다 없다. 지키면 더 좋은 것들은 있고,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게 우리를 더 맞고 좋은 길로 빨리 이끌어주긴 하겠지만.


이 모든 원리는 결혼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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