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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30. 2024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공평하다

20대 후반, 아니 어쩌면 30대 초반까지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 나는 수년간 인생이 암흑기를 경험했다. 아무리 준비하고, 시도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으니 나는 극단적인 생각도 진지하게 했으나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은 가족이었다. 내가 힘들단 이유로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난 지금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내 가족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뒤에 어떤 삶을 살지를 생각해 보니 내가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난 내가 살기로 한 결정이 내 평생에 가장 잘한 걱정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여겨서 극단적인 생각을 했지만, 그 터널에서 한 걸음 나와서 보니 내가 꼭 실패자는 아닐 수도 있겠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단숨에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나는 수년간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변호사는 되지 못했지만 법이, 특히 내 전공이 재미있어서 박사과정의 코스웍은 마쳐서 박사수료는 했는데 문제는 학위논문이었다. 내가 로스쿨과 박사과정을 마친 학교는 로스쿨 체제 하에서 우리 만큼은 학문의 정통성을 지켜내야 한단 의식이 강했고, 내 전공 교수님들이 특히 그랬다. 그렇다 보니 박사학위논문을 통과시키는 기준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학위논문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여러 학기를 보내야 했다. 


힘든 시간이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마지막으로 학위논문 심사를 받은 학기에, 이번 학기마저 통과를 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찾겠단 마음으로 그 학기 폴더를 '마지막'이라고 해놨을까? 법학박사가 된다고 해서 당장 먹고 살 방도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학계가 어떤지는 교수님 조교를 오랫동안 하면서 오래 봐왔는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잔고는 바닥을 친 상황에서 나는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든 건 내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로스쿨 동기들은 5-6년 차 변호사가 되어서 대형로펌에 다니는 동기들은 회사에서 보내주는 유학도 가기 시작하는데 나는 아직도 같은 학교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다니...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보니 나는 학교에 오래 있지를 못했다. 학교에 있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그로 인해 혈압이 오르고 근육이 뭉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학교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때 즈음에 우울감이 찾아와 자칫 잘못하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수년간의 자취생활을 마치고 나는 본가로 다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심사를 받은 학기에 통과를 못하면 그만두겠다는 건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그 학기에 진심으로 먹고 살 다른 방도를 찾았고, 실제로 내가 학부시절부터 알았던 동생이 제일기획을 나와 창업한 마케팅 대행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 드라마 피디인 학부 동아리 선배가 법조물의 기획단계에 같이 해줄  수 있냐고 권유해서 주 1회씩 드라마 기획회의에도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자존감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수년간 변호사시험에 매몰된 삶을 살고, 그 뒤에는 또 수년간 박사학위논문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서 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이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 나는 학부시절과 홍보실에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초창기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케팅 대행사에서 프로젝트와 직원들을 관리하고,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설득할 정도의 능력이 내게 있음을 발견했고, 드라마 회의에도 조금씩 감을 잡은 뒤로는 '너 작품은 쓸 생각 없냐?'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거의 10년 만에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다 보니 그런 상황이 낯설더라. 그리고 나는 법조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내 주위 환경에 매몰되어 있었고,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천재과의 로스쿨 동기들이 없는 것이 내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 나는 나와 함께 로스쿨을 다닌 동기들만큼 주어진 프레임을 이해하고, 암기해서, 그 안에서 노는 것은 절대로 잘하지 못한다. 그들이 전반적으로 나보다 지능이 뛰어난 것도 분명하다. 나뿐인가? 그들은 공부하는 머리로는 대한민국 1% 중의 1%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변화 5-6년 차가 되고, 나는 박사학위 논문도 마치지 못한 백수인 상태에서 조금 자존감을 회복하고 나서 상황을 보니 그들이 없는 것이 내게 있단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어진 틀 안에서 1등을 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누구보다 보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그들은 반대로 경험하지 못한 문제는 잘 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틀을 벗어나지 못하더라. 그리고 그들은 관련 없는 것들을 결합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면서 가는 것도 어려워하더라. 


사실 그들은 그런 일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워낙 뛰어나서 지금 주어진 것에 집중해도 탑을 찍다 보니 그걸 포기하고 리스크 할 용기가 없을 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도 변호사 5-6년 차가 되어서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더라. 몇 년이 지나면 영업을 해야 하고, 실적의 압박을 느끼게 될 텐데 워라밸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거기다 그들 중 상당수는 주 6일 이상, 야근은 기본으로 하다 보니 건강도 안 좋아졌고, 암이 걸린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뛰어난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시급으로는 자신보다 탁월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적은 돈을 받으며 건강도 갉아먹고 있었다. 


물론, 그들 파트너가 친구들은 변호사 10년 차가 넘은 지금은 물리적으로 서면을 쓰는 노동강도는 낮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형로펌은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압박을 받고, 회사를 박차고 나오면 면 그때부턴 말 그대로 서비스와 영업직이 되는 것인데, 공부를 잘하는 천재과의 사람들 중에는 그런 능력은 반대로 없는 경우가 없다 보니 그들도 고민이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변호사는 몸을 갈아서 일한 만큼 벌다 보니 노동시간과 강도 대비 벌어들이는 돈이 많은 사람들은 영업을 잘하고 채용한 변호사들을 잘 관리하는 사람들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변호사들은 또 이직이 잦으니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중요하고, 그들에 비하면 나는 금전적으로 보잘것없는 상태라고 하는 게 과소평가인 수준으로 가난하다. 그래서 내가 불행하고 그들이 부럽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 왜냐고? 최소한 지난 2년과 올해 상반기까지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통장잔고가 늘어날 정도의 수입은 벌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하는 일들은 내가 보람, 의미, 가치를 모두 느끼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나보다 훨씬 탁월하고, 돈도 잘 버는 회사와 로스쿨 동기들과 나의 가장 큰 차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들은 나만 꾸준히, 열심히 하면 경험과 이력이 축적되어서 몸값도 올라갈 가능성이 보이기에 아직은 내 시간과 몸을 투자해서 경력을 쌓고 있는 이 시간이 충분히 의미 있고 해 볼 만한 한 투자임이 분명하다 보니 나는 작년 정도부터 아쉬운 마음이 없다.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가장 큰 진리가 있다면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또 그 불공평함으로 인해 공평하단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은 분명히 있다.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한 쇠수저 정도 되는 사람이다 보니 내 주위에는 금수저와 흙수저가 모두 있는데, 그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하진 않더라. 금수저 중에서 환경을 잘 이용해서 더 큰 성공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부족한 걸 모르고 살아서 세상 물정 모르고 함부로 살다가 수저를 날리거나 사람을 잃은 사람도 있는 반면, 흙수저라는 이유로 불평만 하다 흙수저로 남은 사람도 있는 반면 흙수저로 사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통해서 누구도 보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는 사람도 있더라. 


우린 금수저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흙수저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누군가 금만 갖고 그걸 이용할 줄 모른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대로 흙수저라고 해도 그 흙으로 농사라도 짓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서 금수저를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과거보다 훨씬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나 불가능한 건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최근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반대로 금수저를 가진 사람이 과연 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흙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내가 무엇을 갖지 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마치 성공에 방정식과 공식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다 찾아보면 그 안에는 실패, 힘든 든 시간, 버티기, 노력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린 성공한 사람들이 따낸 열매만 보지만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들도 자신만의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패와 자신만의 인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성공을 이룬 업계, 시기, 규모가 가른데 어떻게 성공의 방법이 있을 수 있겠나? 정말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실패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자신만의 것들을 자신 만의 조합으로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경험은 다른 어느 누구의 경험과도 같을 수 없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성공이 모두 지속가능하지는 않단 것이다. 그런데 많이 실패하고, 넘어져 사람들은 그걸 알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신중하며 그런 그들의 태도가 그들이 실패를 다시 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의 실패와 좌절과 자신의 부족함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그건 그저 부정적인 것으로 남겠지만, 회복하는 시간을 갖고 그 경험을 거름으로 만들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면 그 경험은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반대로 그런 경험 없이 승승장구하기만 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작은 실패에 고꾸라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는 길이 내리막을 향해도 새로운 길로 옮겨 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넘어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가장 큰 실패였던 변호사시험과 박사학위 논문 심사는 역설적이게도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경험과 경력을 선물해 줬다. 나는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전공으로 연구하고, 강의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케팅 대행사에서 일한 덕분에 대기업 유튜브 채널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고, 우연히 발을 담근 드라마 업계에서도 일하는 시간 대비 보수로는 꽤나 괜찮은 비용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경력 중에 내가  선택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나는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주어지는 일들을 했고, 그 경험이 쌓여서 이젠 조금씩 일을 의뢰받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이해하기 힘든 조합들로 일하는 하루, 하루가 힘들고 버겁긴 하지만 재미도 있다. 특히나 이 카드들이 모두 성장 가능성이 있기에 지금 투자로 여기는 이 시간이 나는 굉장히 소중하다. 내가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면, 한 번에 박사학위를 받아서 취직을 했다면 내겐 없었을 선물이다. 심지어 지금 내게 가장 큰 실패로 여겨지는 결혼을 못한 것도 사실 내가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요소다. 


이처럼 당장 실패로 여겨지는 게 실패로 남으리란 법은 없다. 어떤 실패나 불행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활용하는지에 따라 엄청난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어도 낙담하지 말고 울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힘들어하고, 낙담하길 바란다. 힘들고 낙담하는데 지칠 때까지. 그걸 경험해 보면 또 다른 힘들고 낙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절대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럴 있는 힘이 말이다. 


지금 힘들어하고, 울고, 넘어져도 된다. 거기에 머무르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생은 불공평하지만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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