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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23. 2024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

나의 30대 이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내가 이 시리즈 이름에 왜 '오탈자'를 포함시켰는지를 포함시켰는지를 살펴봤으니 그렇게 실패하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자. 20대까지 나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나는 특별하다'는 인식이 무의식 중에 있었던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30대를 지나며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자기 계발서들과 '너는 특별하다'는 식의 위안이 담긴 책, 영상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무의식 중에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긴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한국과 해외를 오가면서 항상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고, 해외에 살 때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하면서 성적도 잘 받았으니까. 고등학교 때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잠시 성적이 안 좋았지만 영어를 워낙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내 자존감은 유지되었고, 재수는 했지만 결국 한국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꽤나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거나 내가 그런 존재라고 말하고 다닌 건 아니지만, 내가 했던 행동과 내렸던 결정들을 종합해 보면 그랬단 것이다.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이 내 안에 있었던 가장 분명한 근거는 내가 실패를 두려워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항상 새로운 일을 벌이는 걸 좋아했고, 그렇다 보니 당연히 실패도 많이 했는데 그게 내 자존감을 갉아먹거나 내가 새로운 시도를 다시 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 학점도 내가 목표한 수준으로 받으면서 다양한 대내외적인 활동을 했고, 그렇다 보니 주위에서는 항상 '너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사냐'는 말을 듣곤 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당시에 나는 목표를 세우면 다른 걸 포기하면서라도 그걸 이뤄내야 하는 독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로스쿨에 진학한 다음이었다. 내가 다녔던 로스쿨에는 유수 대학이나 과의 수석이나 과의 수석들은 물론이고 회계사, 변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과 장학금을 받고 좋은 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중간에 유턴한 사람들이 동기와 위, 아래 기수에 넘쳐났고, 난 그 안에서 내가 생각보다 특출 난 재능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내가 항상 가장 잘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전에도 나는 나보다 특정영역에서 특출 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학교와 회사에서도 봤고,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도 그 과정에서 경험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다른 항상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알거나 특출 난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걸 넘어서 직위와 직책을 없앤 회사에 입사해서는 2년 차에 홍보실에서 대학생 리포터 프로그램을 혼자 기획해서 론칭가지 했다 보니 회사를 그만두고 로스쿨에 입학하던 시점에 나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2년 일해서 모은 돈으로 로스쿨 학비와 생활비까지 해결할 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워겠나? 


하지만  그런 나의 자신감,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오만함은 로스쿨 첫 학기부터 처절하게 깨졌다. 내 동기들은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들보다 똑똑했고, 그러면서도 겸손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더라.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너무 탁월한 사람들 속에서 압박감에 짓눌려서 하루, 하루를 살면서 그 안에서 어떻게든지 빨리, 잘 빛을 내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당시에 내 시선에서 동기들은 빈틈이 없는 괴물 같은 존재들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위축되어서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니 내 로스쿨 생활은 방황만 하다 끝났다. 


그 뒤로 나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한 번씩 내 과거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들도 언젠간 세상에는 생각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만약 그걸 깨달을 만큼 지혜롭지 못하다면 그 사람 주위에 다른 사람이 남아있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오만했다가 산산조각이 나 부서졌던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프리랜서로 살아온 5년 동안 그 조각들을 재조립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나는 5년 동안 재조립한 내 모습이 과거의 나보다 훨씬 좋고 만족스럽다. 


그 조각들을 재조립한 내 모습은,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엄격하고 객관적이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모든 면에서 더 탁월하진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는 이제 나는 내가 남들보다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단 것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고 나니 나름 쿨하게 되더라. 그런데 내가 그에 대해 쿨해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는 것, 어쩌면 탁월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남들이 내게 바꾸라고 했던 지점에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학부시절에 한 형은 내게 '나도 생각이 되게 많은 편인데, 너는 내가 보기에도 생각이 너무 많아'라고 말할 할 정도로 나는 생각이 항상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게 너무 진지하다고 놀리기도 했고, 생각을 좀 줄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나도 나의 그런 면이 싫어졌고, 생각이 없이 살고 싶단 생각을 하며 나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해 왔다. 


그런데 그 '생각 많음'은 생각보다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더라. 생각이 많다 보니 나는 글을 많이, 빨리 쓰는 편이었는데 난 내가 다른 사람보다 글을 많이, 빨리 쓰는 편이란 것을 30대 초반까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글을 쓰는 게 어렵지 않고, 스트레스를 글로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란 것은 페이스북에서 글을 엄청나게 빨리, 길게, 많이 쓰는 내게 사람들이 핀잔을 줄 때부터 알게 됐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 뒤부터 내겐 글과 관련된 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라마 감독인 학부시절 동아리 선배는 내 글을 보고 내게 드라마의 기획단계부터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고, 글을 많이, 빨리 쓰다 보니 연구 프로젝트들에도 많이 참여하게 됐다. 그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내가 브런치에서 7년째 뿜어내고 있다는 건 내가 얼마나 생각이 많고, 글을 많이, 빨리 써내는지를 보여준다. 단 한 번도 장점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나의 성향이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굉장한  장점이 될 수도 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특별하거나 특출 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특별한 한 존재입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본인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드라마 쪽 일을 하다 보니 이 업계에서 본인이 가장 잘난 줄 아는 배우, 감독, 작가들에 대한 얘기들을 종종 듣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특정한 재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것을 잘하진 않다 보니 주위에 피해를 주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회자되더라. 이러한 패턴은 학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본인의 주관이 명확한 편인데,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남을 폄하하고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지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나를 그렇게 위축되게 만들었던 로스쿨 동기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보니 그들이 공부하고, 시험을 보는데 탁월한 대신 다른 결핍들이 있더라. 그리고 그렇게 탁월한 면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엄청나게 성공하거나 남들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도 아니더라. 그들 중 가장 탁월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몸과 마음을 갈아가며 의뢰인에게 맞추기 위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 새벽까지 일을 한다. 그들은 분명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까지 특별해지는 건 아니더라.


우리는 모두 우리가 평균보다 조금, 어쩌면 많이 탁월한 지점들을 갖고 있다. 그걸 '특별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함'이 곧 '탁월함'이나 '우월함'은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은 모든 관계에 우열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름'은 곧 '틀림'이라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 안에 만약 다른 사람과 조금은 다른 '특별함'이 있다면 그 특별함은 '다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다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다름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다름도 존중하면서 살면 된다. 내가 생각이  많다면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 모습 그대로 살면 되면, 내가 우리나라 교육체계 안에서 공부에 대한 평가를 잘 받지 못한다면 내가 잘하는 방향으로 방향키를 틀어쥐고 가면 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특별함'과 '다름'이 정말 유의미할 정도로 다르고 특별한 지는 계속 의심하고 확인해 봐야 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세상에는 정말 특별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 지인의 경우 본인의 학교에서 본인이 학점을 엄청나게 잘 받아서 본인이 굉장히 탁월한 존재라고 여기는데, 옆에서 본 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에 가깝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지금도 살고 있다. 그리고 설사 본인이 특별한 존재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다른 면에서 본인보다 탁월하고 특별할 수 있단 것도 우리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나에 대한 비교군에 따라 자신이 사실은 그렇게 특출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자기 객관화를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작은 특별함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나 본 가장 멋있는 사람은 내가 함께 작업을 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던 유명 배우다. 드라마는 꽤 잘된 편이었는데 코로나가 창궐하다 보니 종방연도 없이 드라마가 마무리되었는데 그 배우님은 소규모 단위로 모든 팀에게 식사를 대접했고, 나도 그 과정에서 그 배우님의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감탄했던 지점은 외모는 물론이고 연기력으로도 굉장히 오랫동안 탑을 유지하고 있는 분이 자신을 굉장히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단 것이었다. 그분은 본인이 무엇을 할  줄 아는지를 알고, 무엇을 못하는지도 아셔서 본인이 못하는 것엔 욕심을 내지 않으시더라. 그리고 계속  배우고 빈틈을 채우려고 노력하기까지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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