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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16. 2024

저는 '오탈자'입니다.

오탈자. 보통은 글을 쓸데 맞춤법을 틀린 단어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로스쿨에 다닌 사람들은 그 말에 다른 의미가 한 가지 더 있단 것을 안다. 다섯 번 탈락한 사람. 우리나라 변호사시험제도는 로스쿨을 졸업한 뒤 5년 이내에 최대 다섯 번까지만 변호사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변호사시험에 다섯 번 불합격 한 사람들을 오탈자라고 부른다. 


회사에 다니다 로스쿨 초기에 퇴사를 하고 로스쿨에 진학했기에 당시에는 오탈자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변호사시험에 불합격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학을 졸업해서, 손에 꼽히는 직장에 취업해서 다니다 손에 꼽히는 로스쿨에 진학했으니까. 학점도 나쁘지 않았고,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기에 20대의 나는 모든 일에 자신만만했고, 떨어지는 사람이 전체 수험생의 30%도 되지 않는 시험에 나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어디 인생은 항상 내가 예상하고 계획한 대로만 풀리지는 않는다. 처음 떨어졌을 때는 내가 시험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로스쿨에 진학해서 대형로펌과 여러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을 하면서 변호사들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지를 알게 된 된 이후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고 '변호사시험은 당연히 합격하겠지'란 마음이 한편에 있어서인지 나는 로스쿨 3학년 때 사실 시험준비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첫 변호사시험에 불합격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세상과 소식을 끊고 변호사시험에만 올인했던 두 번째 시험에는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 심지어 당시에 만나던 여자친구와도 다툼이 잦아지자 시험은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며 일단 헤어지고, 시험이 끝나고 나서 다시 연락하자고 했을 정도로 난 시험에 올인한 상태였으니까. 시험을 보고 나서도 마찬가지. 나는 시험에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고 6개월 간 실무수습을 할 곳을 찾았고, 글로벌 IT기업의 법무팀 인턴으로 합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게 또다시 돌아온 건 불합격 소식이었다.


그 뒤에 두 번의 시험은 사실 시험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로스쿨에 다니면서 진심으로 관심을 갖게 된 전공이 있어서 당시에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하기도 했고, 더 현실적으로는 2년 간 다닌 회사에서 받고 모은 돈으로 로스쿨 학비와 생활비를 로스쿨 3년 동안 다 썼기 때문에 돈이 없었다. 아버지도 퇴사를  하신 시점에, 서른 살도 넘은 장남이 부모님께 손을 버릴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나는 그 뒤 두 번의 시험은 일하고, 박사과정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변호사시험을 준비했다.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그리고 내게 남은 마지막 기회는 올인을 한다고 생각했고, 다섯 번의 시험 중 가장 합격할 줄 알았던 시험이었지만 나는 이전 네 번의 시험과 같은 결과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다섯 번을 같은 결과를 받아 들어도 거기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결과 발표가 나는 날, 몇 시에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로 나는 일분, 일초를 온몸으로 느끼며 버티다 지쳐 눈에도,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영화만 돌아가면서 봤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라라랜드. 그 명작을 완전히 진이 빠진 상태에서 본 뒤 불합격이란 결과를 확인했다 보니 난 그 뒤로 라라랜드를 다신 볼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별의별 상황들을 다 겪어야 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는 상황을 모르는 지인들은 욕심내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했고, 부모님께선 하루 종일 방에는 있는데 공부한 건 맞냐고 하시더라. 그때의 생각과 감정들을 브런치에서 시리즈로 썼던 적도 있는데 그때는 또 내 모교의 재학생 커뮤니티에서 좌표를 찍고 와서 비아냥 거리고 비난하는 것을 링크를 타고 들어가 발견한 적도 있었다. 내가 졸업한 로스쿨의 경우 '우리 학교 출신은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고 초기에 생각했는데 우리 기수의 첫 시험 합격률이 생각보다 낮다 보니 모 교수님은 '학교 이름에 먹칠하는 것들'이라고 하셨다더라. 


그 와중에 가장 힘든 건 법조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지도교수님 조교를 하다 보니 나는 교수님은 물론이고 로스쿨 선후배들을 학교에서 계속 만나고, 로스쿨 시험 시간에 감독을 하러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사실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도 이어졌다. 사법고시나 변호사시험을 합격한 변호사, 검사, 판사들 사이에서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법학박사가 껴있는 건,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내겐 엄청난 고통이었다. 난 그들과 회의를 하거나 모일 때는 마치 그들이 모두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왜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는지를 분명하게 알았다. 내가 암기가 약한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더라. 난 판사가 되어서 누군가의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고 어렸을 때 해외에서 학교를 오래 다녀서인지 검찰의 조직문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변호사만 남는데, 변호사는 일정 연차가 차면 결국은 영업을 하는 개인사업자더라. 변호사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때때로 양심에 반하는 글도 쓰고, 나쁜 놈인 걸 알면서도 변호를 해야 하는데 성격이 모난 편이라 그럴 자신이 없었다.


만약 '5년 이내'라는 요건 없이 변호사시험을 독일처럼 평생 언제 봐도 상관없이 총 2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로스쿨 3학년 때도 변호사시험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이미 고민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사실 2번째 시험에 불합격하고 글로벌 IT기업에서 6개월 간 일하면서 나는 변호사로 일하고 돈을 벌 생각은 접었었다. 당시에 나와 일하셨던 팀장님은 내가  변호사시험을 다신 보지 않을 줄 아셨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변호사시험을 계속 본 것은 박사과정에 있는 중에 교수님들이 '이제는 학문을 해도 라이선스가 있어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마음으로, 하고 싶지 않은 암기와 법학해석론 공부를 하니 성격이 모가 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시험 자체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법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변호사시험이 요구하는 것처럼 법률은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 해석과 적용을 하는 법학 해석론적인 시선은 체질에 잘 맞지 않다 보니 계속 비슷한 곳을 보고, 보고, 또 보면서 돌기만 했던 것 같다. 합격해야  한단 생각과 압박에 시달려 한 달 넘게 신경안정제를  먹으면서 잠을 설치기도 하고, 불안증세가 나타나서 약을 처방받아서 먹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난 그때 '변호사가  반드시 되어야겠어!'란 마음가짐은 없었다.


그 이유도 분명했다. 대형로펌에 가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변호사로 받을 수 있는 돈은 내가 다녔던 회사에 다니는 동기들의 연봉보다 적었고, 그러면서 나는 영혼을 팔면서 일을 해야 할 게 눈에 보이더라.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그 회사를 그만둔 것이란 말인가? 


나는 몇 년 전까지도 나의 첫 직장을 그만둔 것을 후회했다. 로스쿨에 다니며 변호사로 사는 현실을 알게 된 뒤에는 인턴을 했던 로펌 회식이 끝나고 지하철 첫 차를 내가 다녔던 회사 사옥 옆 휴게 공간에서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왜 그랬지...'란 생각을 끊임없이 했을 정도로 난 나의 선택을 후회했다. 심지어 내 회사, 로스쿨 동기들의 연봉을 대략적으로 알다 보니 내 손에 다 들어왔었는데 내가 받지  못하게 된 돈도 액수로  계산이 되더라.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게 후회를 하냐고? 아니다. 내가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었냐고? 아니다. 하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고, 감사할 뿐 아니라 회사를 그만둔 것은 후회하지 않기 위한 결정들을 계속해 오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게 보인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와 과정은 이 시리즈에서 조금씩, 조금씩 풀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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