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거나 내가 그 사람에게 안겨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안아줄 때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것을 자주 느꼈다. 연애할 때는 누구보다 스킨십을 좋아하고, 어렸을 때는 연애할 때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 불 같이 타오를 때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아서 상대를 당혹스럽게 할 때도 있었다. 다만, 상대의 의사에 반한 강압적인 스킨십을 하거나 실질적인 강요에 가까운 부탁을 한 적도 없다. NO는 그냥 NO라고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항상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브레이크를 잡는 게 쉬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연애기간이 길어지고, 횟수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나는 언젠가부터 스킨십을 스스로 절제하고 나 자신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는 그렇게 스킨십에 매몰되기 시작할 때, 내가 얼마나 눈이 멀어버리는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상대와 스킨십의 밀도와 빈도가 강해질수록 상대와 있을 때는 스킨십 외에 다른 생각은 잘 들지도 않았고, 상대와 특정 장소에서 스킨십을 깊게, 많이 할수록 그 장소에만 가면 그때의 기억이 내 모든 감각을 지배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들었다.
스킨십은 중요하다. 개신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스킨십을 통해서 서로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좋아하고, 스킨십 과정에서 안정을 느끼기도 하는데 교회 다니는 여자분들은 작은 스킨십도 익숙하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보니 '내가 과연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내게 스킨십은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는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스킨십이 전부는 아니고, 관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킨십은 '수단'이다. 스킨십은 상대에게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상대의 마음을 느끼는 '과정'이어야 한단 것이다. '선섹후사'라는 명제가 잘못된 것은 섹스를 한다고 해서 사랑이 곧바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선섹후사'는 섹스를 과정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누군가와 섹스를 하기 위해 만나면 그건 이미 상대를 나의 섹스 상대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섹스를 해야만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시작서부터 사랑으로 갈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왜냐고? 그건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나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상대를 나의 소유로 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나 자신만큼이나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 공식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섹스나 스킨십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나라고 그런 적이 없을까? 나도 소개팅을 한 첫날, 서로 기대도 없이 차 한 잔을 마시기로 약속했던 만남이 길어지면서 당일날 저녁에 상대의 집에 가서 저녁도 먹고, 서로가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수준의 스킨십까지 했던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감정이 불타오르면 스킨십의 단계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둘의 감정이 동시에 타오름으로 인해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하고 싶지는 않다. 서로의 감정이 불타오르면, 한 번씩 그럴 때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만남은 어떻게 됐냐고? 그렇게 좋게 끝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분명히 있었지만 신뢰나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스킨십 이후에는 상대도 나를 여러 측면에서 의심하고, 나도 상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 그 분과의 만남은 아주, 매우, 극도로 짧게 끝나고 말았다.
연애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상대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즐기는 것이라면 '선섹'이 맞을 수 있다. 섹스만큼 우리의 말초신경을 극단적으로 자극하고, 쾌락을 선물해 주는 것은 없으니까. 다만 우리는 그게 얼마나 오래갈 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래된 커플이나 부부가 왜 스킨십이 없어질까? 그건 연애나 결혼 초기에는 스킨십과 섹스가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느낌이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오래될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섹스나 스킨십을 먼저 하게 되면 스킨십은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자,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믿음과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스킨십을 하면 두 사람은 스킨십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만큼의 마음이 없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기 전에 섹스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건 마음이 아니라 '쾌락'과 '오락'적인 즐거움 밖에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런 스킨십에서 느껴지는 자극과 쾌락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느껴지는 강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것도 상대와의 관계에서 더 이상 자극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에 대해 비난하거나 판단할 생각은 없다. 개인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그런 선택을 응원하거나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것은 그런 선택은 결국 본인에게 상처를 남기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상대에게 나의 몸을 먼저 내어주고, 그 뒤에 관계를 이어가던 중에 상대가 더 이상 나와의 관계에서 어떤 자극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게 된다면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취급을 받으면 우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고, 마치 도구로 사용된 뒤 버려지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관계의 시작과 중심이 '쾌락'인 관계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를 도구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선섹후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속궁합'을 말한다. 물론 그런 물리적인 요소들도 스킨십에서 중요하지 않진 않다. 하지만 스킨십에도 그런 물리적인 요소가 전부는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어떤 마음으로 만지고, 서로 품어주느냐에 따라서, 스킨십의 '과정'에서 충분히 스킨십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 자극과 쾌락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 그런 물리적인 요소들만 강조하면서 선섹후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진정한 사랑과 스킨십에 있어서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유튜브 콘텐츠들이 성적인 요소들과 관련해서 자극적인 내용만을 만들어 낸다. 그게 조회수를 만들어 내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콘텐츠를 접하거나 상대가 그런 콘텐츠를 근거로 '이것 봐, 선섹후사가 좋다잖아. 스킨십(섹스)은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잖아'라고 설득하는 과정을 경험하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강요에 가까운 설득에 넘어가기도 한다. 반면에 그에 대한 반론은 누구에 의해서도 제기되지 않는다. 누구도 스킨십을 어떻게 하는 것이, 왜 중요하고 그게 우리의 정서와 상대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섹스와 관련해서도 '전위'나 '후위'라는 표현이 사용될 뿐이지 그걸 '사랑'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두 사람이 스킨십을 서로 마음을 통해 설명이 안 되는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면, 두 사람은 그 스킨십에 익숙하거나 질릴 수가 없다. 이는 상대가 힘들어할 때 꼭 안아주거나 어깨를 내어주고, 힘들 때 토닥여주며, 불안해할 때 손을 꼭 잡아주거나 상대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키스를 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 축적되다 보면 두 사람의 경험과 스킨십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두 사람의 정서와 마음, 생각과 결합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사랑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서로 전달해 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순간순간마다 내게 결핍된 감정과 정서를 채워주고, 우리의 감정과 정서는 완벽하게 동일하거나 동질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기능을 하는 스킨십에 익숙해지거나 질릴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섹스부터 하고 속궁합이 맞는지, 쾌락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의 합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커플들 중 전부는 당연히 아니지만 상당수, 아니 어쩌면 대부분은 자극이 약해지면 관계도 느슨해지면서 소원해 질 확률이 높다. 물론,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스킨십부터 한 사람들 중에서도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감정이 휘몰아치면서 그렇게 된 것과 처음부터 '섹스를 해서 영 아니다 싶으면 사귀지도 않을 거야'라고 마음을 먹는 것은 다르다. 이는 전자는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감정이 통제되지 않아서 우발적으로 몸이 가까워지는 것인 반면 후자는 상대를 나의 성적인 도구로 놓고 머리로 계산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그렇게 도구로 여기고 관계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확률의 싸움이 아닌가? 섹스부터 하는 것이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고, 깊게 알아가면서 상대를 나 자신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으로 갈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두 사람이 서로 진지하게 알아가고 신뢰와 믿음이 형성되었을 때 서로에 대한 마음의 표현으로 스킨십을 하게 되었을 때 그 관계가 진정한 사랑으로 갈 확률이 높을까? 당연히 후자가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건, 스킨십은 자극이 엄청나게 강한 반면 서로를 깊게 알아가는 과정은 자극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미료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은 자연 본연의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반면, 자연 본연의 맛에 익숙한 사람도 조미료의 맛은 느낄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선섹'을 강조하고 추구하는 것은 조미료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들이 자연 본연의 맛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야기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되면 굳이 조미료 음식은 찾지 않게 되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면 스킨십과 섹스가 관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스킨십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합의 하에 가볍게, 쾌락적으로 즐기는 관계를 목표로 한다면 '선섹'이 우선되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런 선택을 할 때는 그 과정이 반복될수록 진정한 '사랑'과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선섹'에 익숙해지는 건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이고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의 만남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조미료에 길들여지면 입맛이 돌아가기 어려운 것처럼 '선섹'에 익숙해질수록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아는 게 힘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스킨십과 섹스를 유독 강조하는 건 그들이 진짜 사랑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섹'은 자유다. 하지만 '후사'가 그 뒤에 자연스럽거나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선섹후사'를 말할 때, 어떻게 반박할지 몰라 곤란하거나 난감하신 분들이 자신의 마음과 결정을 지키는데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