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면서 다른 지역으로 주 2회 강의를 가고 있다. 강의 외에도 다른 일들이 있는 게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일이 많다 보니 쉬는 날 없이 계속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브런치에 글도 쓰지 못하고, 심지어 내가 지쳐가고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몰아치면서 지난 몇 달을 살았다. 그러다 오래간만에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되면서 내 상태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잠시 쉬어가야겠단 생각을 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치를 부리는 과정에서 문득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내용을 하나의 글로 정리해 보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됐다. 뭐든지 확실히 이해하게 되면 짧게 정리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브런치에서 6년 넘게 이 주제로 다양한 글을 써 왔으면 이제는 이 주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압축적이고 짧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
일본의 20-30대는 연애를 포기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한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뉴스가 계속 나오더라. 그리고 그에 대한 분석과 결론은 항상 똑같다.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도 똑같은 공식이 적용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물론 돈이 없고 사는 것이 빡빡해서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정말 좋아한다면, 그 좋아하는 것의 효용을 안다면 돈 때문에 무엇인가를 포기할까? 아니다. 애연가들은 밥은 굶어도 담배는 피우고, 그렇게 돈이 없다면서도 낚시가 취미인 사람들은 주말마다 낚시를 다닌다. 아이들의 열렬한 팬들도 자신의 소비를 줄이고서라도 아이돌의 굿즈를 산다.
연애와 결혼도 마찬가지다. 만약 연애와 결혼이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월세집에 살고 생활비를 아껴서라도 연애와 결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연애와 결혼은 어떤가? 남자들 중에는 여자친구에게 데이트 폭력을 가하는 것을 넘어 살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자들 중에는 남자를 자판기나 현금인출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부각된다. 자극적이니까.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얘기보다는 이혼한 사람들 얘기가 많이 들리고,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좋은 얘기를 입 밖에 내는 것을 민망해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성상 결혼을 추천하는 사람이나 말보다는 '결혼하지 마'라면서 결혼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기혼자들이 훨씬 많다. 실제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보통 가정과 배우자에 충실하다 보니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덜 만나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네가 최수종이냐? 션이냐?'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하다 보니 입을 잘 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금전적인 어려움과 한계를 극복하면서까지 굳이 연애와 결혼을 하려는 리스크를 할 사람이 많이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뿐인가?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결혼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그냥,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을 했고 본인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결혼을 했다 보니 20-40대 중 상당수가 부모에게 '니 아빠(엄마) 같은 사람은 절대로 만나지 마라'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귀가 아프게 듣고 자랐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고 있는 게 과연 지금의 20-40대의 잘못일까?
그렇다면 연애와 결혼은 정말 하는 게 필요하고 좋은 걸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연애와 결혼은 필요하지 않다거나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연애와 결혼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6년 넘게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을 써온 것은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춰봤을 때 인간은 결국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사회단위인 가정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고 어딘가에, 누군가에게는 수용을 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왜냐고?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우린 상처받고 힘들 수밖에 없다. 돈을 버는 건 상대가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을 해주는 대가로 상대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로 옮길 수 있게 된다는 걸 의미하는데,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 나의 편이 되어주는 존재, 내 안에 쌓인 육체적, 감정적 젖산을 해결할 공동체가 우리는 모두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존재와 공동체가 있어야 우리 안에 쌓인 피로감을 해결할 수 있다.
혹자는 '나는 스트레스를 다른 것으로도 풀 수 있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싱글들은 취미가 많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취미가 우리에게 주는 효용이 '평생' 갈 수 있을까? 우리가 취미를 하면서 즐거운 것은 일상에서 탈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부여되는 새로움으로 인해 도파민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취미생활을 일정 수준과 기간 이상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취미가 일상이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새로움을 찾아서 떠난다. 싱글들이 취미부자가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건 무슨 심리일까? 냉정하고 솔직하게 얘기하자. 외롭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수용을 받고는 싶은데, 지인들과의 관계에서는 그 한계가 분명하게 느껴지다 보니 우리는 또 다른 생명체인 반려동물에게 의지한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서 장담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14년 동안 키웠던 강아지에게 얼마나 크게 의지했고, 위로를 받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반려동물에게 의지하려는 심리에는 역설적이게도 그나마 반려동물들은 사람보단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반려동물은 내가 데리고 산책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내가 통제를 할 수 있는 반면 사람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물론,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도 쉽지는 않고 신경 쓸 건 많다. 하지만 반려동물은 최소한 내게 비판을 하거나 자의식에 상처를 주지는 않지 않나? 반려동물을 키우다가 그것마저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식물로 넘어간다는 말을 나는 가볍게 웃어넘길 수가 없더라.
이렇게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린 인간은 연애와 결혼을 무의식 중에 갈망한다는 걸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그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로맨스가 들어간 드라마들의 흥행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남의 연애를 보는 게 뭐 그렇게 재미있을 일인가?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애와 결혼에 대한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엄청나게 흥행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는 짝, 지금은 나는 솔로, 환승연애를 넘어서 이제는 남매들이 입주해서 연애를 하는 프로그램까지 나왔다. 넷플릭스에서 흥행한 Love is Blind라는 시리즈는 이제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여러 나라들 버전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얼마나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나?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그런 프로그램들과 뉴스를 찾고 관심을 갖는다는 건 그만큼 우리 안에 그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무의식 중에라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위로받고, 수용받을 수 있는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있는 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사실 상대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수용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나부터가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학, 상대가 그렇게 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상대가 그러는 걸 당연하게 느끼고 여기는 순간 상대가 그러하지 않을 때 상대에게 분노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건 상대를 내게 효용을 주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좋은 연애와 결혼, 경제적으로 조금 힘들어도 유지하고 싶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가 해주는 걸 고마운 마음을 받을 줄 모르다 보니 상대의 호의를 부담스러워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받는 것만 좋아하고 상대에게 주는 방법은 모른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시너지를 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지속적으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오해하지 말자. 여기에서 주고받는다는 게 선물이나 금전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금전적인 요소가 그 과정에 개입하고 관여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금전적인 요소는 도구이자 수단이지 본질은 아니다. 돈은 있으면 더 좋지만 우린 돈이 많지 않아도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있단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상대의 편이 되어주는 것엔 돈이 들지 않는데 연인과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렇게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선물도 무조건 비싸고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게 더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을 만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상대도 그런 사람이어야 시너지가 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젠가부터 이기주의를 개인주의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주고받는' 관계보다는 '받기만 하는'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상대가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이성으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거나 결이 달라서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지 않으면 그 관계 또한 한계에 부딪히다 보니 그런 시너지가 남과 동시에 이성으로 서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건강한 연애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것을 타협해야 한다. 출산까지 간다면 그보다도 더 많은 것을. 그리고 그 타협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타협이 아니라 쌍방향이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고, 그로 인한 피해의식도 없지 않다 보니 그 또한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연애와 결혼이 필요하다가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희생보다 건강한 연애와 결혼이 주는 행복과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해외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인지 나는 부모님께도 기본적으로 할 말은 다 하는 편이었고, 화가 나면 언성을 높이기도 하면서 대들었는데 어머니께서 어느 날 그러시더라.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해도 내가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네가 내게 준 행복과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결혼과 출산과 육아에 대해 '나를 너무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데, 그건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과 아이가 주는 행복과 기쁨을 모르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을 해보지 않고 무조건 '내가 잃는 겐 너무 많아'라고 말하는 건 자신이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나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 무조건 맛이 없고 그 음식을 맛있어하는 사람은 이상한 존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리안을 예로 들어보자. 난 어렸을 때 동남아 국가에 살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리안과 고수를 접했고, 그 맛을 환장할 정도로 좋아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두리안과 고수는 싫어하더라. 그렇다면 내가 이상한 존재인가? 아니다. 그들도 계속 참고 먹다 보면 그 맛과 매력을 알게 될 것이다.
음식은 그냥 먹거나 먹지 않으면 된다. 대체재가 있으니까. 그렇게 참고 먹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평생 나의 편인 사람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도 연애와 결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친구도 많았고, 여사친들도 많아서 언제든지 만나고 통화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들과 나의 인생길이 달라지면서 우리 대화가 통하지 않기 시작하고, 여사친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빈도가 줄어들더라. 어제는 오랜만에 조금 멍 때릴 시간이 생겨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려가 봤는데 저녁 8시에 부담 없이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없더라. 이성은 혹시나 상대가 부담스러워하거나 그 배우자가 싫어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고, 동성의 경우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과 통화할 소재가 떠오르지를 않아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한 번에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보통 경험을 통해 배운다. 사람은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하는지의 영향을 반드시 받기 때문에 연애는 항상 신중하긴 해야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연애도 리스크를 수반하기 때문에 그 시점에 리스크를 해도 되겠단 마음이 들면 우리는 일단 연애를 해볼 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한걸음 물러나서 생각해 봤을 때 상대와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고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느껴지면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관계를 끝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어떻게 되냐고?
그렇게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건 상대를 여전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은 우리가 상대를 소유하고 싶거나 상대에게 의존적인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자. 많은 사람들은 상대를 보고 설레고, 보고 싶은 마음이 곧 사랑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그건 사랑은 아니다. 그런 마음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볼 때의 마음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아니다. 이성에게 설레는 마음과 갖고 싶은 것을 볼 때 드는 마음은 현상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 뿌리는 같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의미도, 필요도 없다는 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이성관계에서도 상대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 시작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고, 그 자리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고 잘해주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안타까운 지점은 많은 사람들은 거기까지만 간다는 것이다.
상대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상대의 재력이 탐나서, 상대가 내게 맞춰줘서 상대를 갖고 싶었던 마음이 들 수 있다. 인간은 대부분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고 호의를 베푼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와 마음에 거기에 머문다면 그 마음은 호감이나 좋아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게 갖고 싶은 차나 가방을 사기 위해 다른 곳에 돈을 아끼는 것과 다른 게 뭐가 있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건강하게 의지하는 관계는 처음에는 상대를 소유하기 위해서 상대에게 맞추던 것이 나의 욕구와 욕망을 넘어서 상대의 안위와 행복을 진심으로 위하기 시작할 때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상대가 힘든 것이 신경 쓰이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진심으로 해주고 싶을 때 우리는 그것을 비로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진짜 사랑을 할 때 두 사람은 상대를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로 삼고 싶어질 것이다.
문제는 한 번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데 있다. 그런 마음과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연인과 부부간에는 꾸준히, 미주알고주알 작은 것에 대해서도 대화를 하고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같이 살지만 대화가 없는 부부는 두 사람이 진짜 사랑을 했어도 그 사이에 사랑이 떠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낭연한 일이다. 결혼한 부부가 하루 중 몇 시간을 물리적으로 함께 있을까? 한 사람만 회사에 다녀도 두 사람은 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에 얼굴을 보는 시간이 4시간을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6시에 퇴근해서 집에 7시에 도착, 12시에 잠을 잔다고 해도 아침까지 포함하면 6-7 정도를 같은 공간에서 보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보다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지 않나?
깨어 있는 시간의 1/3 정도를 부부가 한 공간에 있는다고 쳐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경험을 2/3시간 동안 한다. 그런데 인생의 2/3를 서로 공유하지 않고 서로 모른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점점 모르게 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게 아닐까? 부부는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기라도 하지 연인들은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1-2번, 한 번 만나면 길어야 5-6시간 정도를 함께 있는다. 그 정도 시간에는 누구나 상대에게 어느 정도는 맞춰줄 수 있고, 두 사람이 문자나 전화로 서로의 삶을 공유하지 않으면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한 이해가 절대로 깊어질 수가 없다.
이렇듯 두 사람이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법을 아는 것도 힘든데, 우리는 연애와 결혼에 대해 너무 많은 노이즈가 존재하는 세상에 산다. 스킨십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과 통로로써 매우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스킨십을 쾌락적인 측면에서만 강조하고 그 필요성을 주장하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애와 결혼의 대가와 부정적인 면들이 미디어와 사람들의 입에서 전달되는데 그러한 영향들 속에서 진심으로 서로를 아껴주고 상대의 편이 되어주는 연애와 결혼을 하긴 쉽지 않다.
연애와 결혼에 일정 수준의 대가가 존재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출산과 육아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만약 그 비용이 연애, 결혼과 육아가 주는 효용보다 작다면 연애, 결혼과 육아는 결국 남는 장사가 아닐까? 우린 왜 비용만 생각하고 그 효용은 생각하지 않을까? 그것도 결국 돌고 돌아서 결혼과 육아를 해보지는 않았고,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말만 많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행복한 연애, 결혼, 육아를 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는 건 연애, 결혼, 육아가 얼마든지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애는 절대로 싫다고, 아들 나면 강하게 키울 것이라던 남중, 남고, 공대 나온 형이 아들 바보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내 주위에 한둘이 아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사실 넘쳐난다. 그런 걸 보면 연애, 결혼, 육아에는 분명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이혼한 사람들이 다시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미혼들은 모르는 뭔가가 그 안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시도해 보고, 원하지 않은 끝을 맺었어도 괜찮다. 그게 곧 실패는 아니다. 그 과정과 경험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낀 게 있다면 다시 시도를 해도 된다. 이는 이별과 이혼은 실패가 아니라 실수에 불과하고, 험난한 세상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건 것보단 리스크를 하는 투자를 통해서 내 편을 만나서 누릴 수 있는 효용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